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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Mar 29. 2024

4. 남의 국경에 발을 한번 들여놓고

-이용후생정덕

  남북한의 경계는 삼팔선이다. 땅바닥에 그어놓은 선 이쪽이 남한이고 저쪽이 북한이다. 조선과 중국과의 경계는 책문이다. 나무를 짜개어 대략 만들어놓고 그 나무 위에 이엉을 덮고 널빤지 문짝을 굳게 걸어 잠근 것이다. 허술한 국경이다. 저절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삼엄하게 경계 태세를 하는 판문점이 눈에 익은 내 눈에는 두말할 것 없이 아주 허술한 국경이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가는 다리처럼 술래잡기하다가도 자칫 방심하면 다른 나라로 넘어갈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에서처럼 선 하나만 성큼 넘어오고 넘어가는 날이 언젠가 올 수도 있다.   

   

  통관 절차를 기다리며 연암은 책문 안쪽을 관찰한다. 민가의 대들보와 지붕과 등마루, 대문과 창문을 살핀다. 길거리와 담장, 진열된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촌티가 나지 않는, ‘책문의 규모는 크고 기술은 세밀하다.’(홍대용) 연경을 보기도 전에, 오지 벽지부터 이러니, 기가 확 꺾인다. 여기서 바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질투이다. 평생에 무엇을 시기 질투한 적이 없는데, 얼마나 큰맘 먹고 나선 길을 돌아가고 싶어? 경우의 수를 얼마나 많이 예측하고 상상했지만 스스로 돌아가고 싶어지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남의 국경에 한번 발을 들여놓고 본 것은 만분의 일인 터에 왜 이렇게 망령된 생각이 치솟는가? 연암은 자기의 견문이 좁은 것을 탓하며 반성한다. 시기 질투의 원인을 참 잘 찾아냈다. 역시 연암이다. 한반도의 지역은 죄다 다녔을 법한 연암이다. 서쪽으로 평양과 묘향산, 남쪽으로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1765년 가을 스물아홉 살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여행동무(?)를 급구(急求)한 것도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여종이 골목에서 외쳤다. “우리 집 작은 서방님 이불짐과 책상자를 지고 금강산에 따라갈 사람 없나요?라고.      


  타 문화와의 조우는 항상 강렬한 충격을 동반한다. 버스를 타고 뉴욕 거리를 통과하던 한국인 관광객이 물었다.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 건물이 없을까?” 새마을운동으로 누추한 시골집을 뜯어고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촌사람들에게 이백 년 전에 이런 건물을 세운 미국인들이 하늘처럼 우러러 보인다. 영어 좀 한다고 인정을 받던 대학생이 미국에 갔더니 거지도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더란다. 중국 문화를 탐구하려고 나선 연암도 이 순간에, 어쩔 수 없이 어리바리한 자신을 의식한다.      


  자, 어떻게 이 순간을 모면할 것인가. 연암은 석가여래의 밝은 눈을 떠올린다. 부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두루 본다면 모두 평등할 것이다. 모두 평등하다면 투기나 부러움도 없으리라. 유학의 원조인 중국에 들어가는 마당에, 유학으로 수신(修身)이 안 되는 선비라니, 나는 웃었다. 유교를 가지고는 중국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의 눈높이에 맞추어주는 건 석가의 말씀이나 해줄 수 있다. 시치미를 떼고 있어도 연암은 부처의 말씀을 접해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지성은 유학으로, 감성은 불학(佛學)으로 다스린 조선 선비의 민낯이 기어이 나온다.      


  책문이 활짝 열렸다. 문에 일단 들어서면 중국 땅이다. 연암은 착잡한 심정으로 동쪽을 향해 한참을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책문 안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한참 숨을 고르고 각오를 다졌지만 그곳의 인가 20~30호가 절로 찬탄을 부른다. 술집에는 넉 냥짜리 술잔이 있고 점포는 반듯하게 진열되고 (심지어) 짐승의 우리에도 법도가 있고 장작더미나 거름 구덩이도 정밀하고, 벽돌 우물과 두레박, 비석도 근사하다. 궁벽한 촌구석이 이렇게 화려한데 집 짓는 제도는 다 같다니, 수도인 연경도 이보다 더 낫지 않으리라.      


역관-궁벽한 변방 촌구석에 뭐 볼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연암-비록 황성에 가더라도 꼭 이보다 낫지만은 않을 걸요

역관-그렇습니다크기나 화려한 정도야 다르겠지만 규모는 대부분 서로 같습니다     


청나라의 문화문물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봐버렸다. 되놈의 나라로부터 본받아야 할 것을 샅샅이 잡아내는 예리한 안목과 단단한 의지도 대단하거니와 미처 포착하지 못한 그 이면의 힘은 얼마나 될까! 그 유명한 <이용후생정덕>이 여기에서 언급된다. 아하, 제도가 이렇게 된 뒤라야만 비로소 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용을 한 뒤라야 후생을 할 수 있고 후생을 한 뒤라야 정덕을 할 수 있겠다. 쓰임을 능히 이롭게 하지 못하고 삶을 두텁게 하기란 드문 경우이다. 사람이 이미 스스로 두텁게 하기에 부족하다면 또한 어찌 자신의 덕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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