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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Sep 13. 2024

28. 나는 앞의 개를 따라 짖는 개다

-A barking dog following the leading dog

연암은 책 목록 하나를 빌립니다. 청심환을 줘야만 빌려준다니 청심환을 줘 가면서 빌렸습니다. 그 명성당서목을 일단 베껴놓기로 합니다. 주로 청나라 만인들의 소품(小品) 70여 종 목록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명나라 사람 이탁오의 책이 있습니다. 분서(焚書) 6책, 장서(藏書) 18책, 속장서(續藏書) 9책입니다. 어쩌자고 한인인 이탁오의 책이 만인들의 책 사이에 버젓이 들어 있을까요? 그래도 괜찮은 출판사에서 알만한 작가들과 함께 목록되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책 이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분서(焚書)란 읽으면 태워버릴 책이란 뜻이잖아요? 장서(藏書)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감추어 두어야 할 책이고 속장서(續藏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 검색에 따르면 탁오 이지(1527년 11월 19일~1602년 5월 7일)는 명나라 말엽 사람입니다. “잘나신 나”라는 뜻의 “탁오”로 더 잘 알려져 있그는 유학자인데도 성리학교리와 예절을 반대한 이단아였습니다. 주자를 비롯한 당대 학자들의  재해석이 오히려 공자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니, 순수하게 공자의 말씀만을 들여다보자고 역설했습니다. ‘이 세상에 공자가 나지 않았더라면 천하가 깜깜했을 것’이라는 말에, ‘공자가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대낮에 촛불을 들고 다녔을 거’라고 비꼰 입니다. 난장이인 자신이 키가 작아 보이지도 않는 굿(공자)을 '남들이 좋다고 하면 그저 나도 좋다고 따랐고, '나는 그저 앞의 개가 짖으면 따라 짖는 개였다'라자기성찰과 더불어 말입니다.“     


“오십 이전의 개”는 개이기를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20여 년을 고생하여 연금이 보장되는 지위까지 올랐는데 그걸 홀가분하게 팽개치겠습니까? 3년여를 더 버틴 끝에 물러납니다. 흡사 중국판 폴 고갱 격인 이탁오는 1780년의 연암에게는 머리 깎은 사람이었습니다. 두피에 가려움증이 생겨 머리카락을 깎았답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인지 몰라도 남자의 변신은 절대로 무죄가 아닌 주자학 시대에 삭발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스스로 갑자기 머리를 깎은 이탁오는 성질이 흉악한 놈으로 연암이 알기에는 머리 깎은 죄로 파직당합니다. 이탁오가 죽고 불과 42년이 지난 1644년에 머리를 깎아도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 열립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탁오도 머리 깎은 죄로 파직당한 게 아니라 인생 후반전의 방향 전환을 위해 스스로 사직했답니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는 한 말씀에 해석의 더께를 쌓고 덮어씌워 가부장제의 병폐가 생겼으니 본래 남녀는 생리적 차이는 있어도 식견과 능력의 차이는 없답니다. 이런 급진적인 견해는 분위기에 따라 툭 나옵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건 또 다르지요. 그런데 이탁오는 명실상부합니다. 여자들을 받아들여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성평등과 자유연애를 강의하면 부녀자와 비구니를 비롯하여 남녀 학생들이 몰려듭니다. 주자학의 본거지 중국에서 남녀칠세동석(男女七歲同席)으로 강론합니다. 남녀공학을 실시하다니, 이거 실화? 이탁오는 누구인가요? 17세기에 여자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은 그나마 기독교에서나 있었을 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탁오는 마테오 리치와도 교류한 적이 있습니다.      


이탁오가 사대부 여인들을 꼬여 불법을 강론하는데 이불을 들고 와 자고 가는 자도 있답니다. 이탁오가 여자들을 희롱한답니다. 풍속과 교화를 해치며 음란을 조장하는 요망한 중이랍니다. 여자는 공부해봐야 소용이 없는데 왜 헛수고를 하냐고, 여제자인 매담연까지 싸잡아 비방의 대상이 됩니다. 매담연은 스승과 부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1602년 이탁오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갑니다. 벼슬을 지낸 유학자가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못된 서적을 간행하며, 공자를 비롯한 인물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뒤엎었다는 것입니다. 남녀의 벽을 무너뜨렸다는 죄가 추가됩니다. 이탁오는 그의 나이 76세(1602년)에 혹세무민의 죄로 투옥됩니다.   


연암의 1780년 목록에는 이탁오의 분서 6책, 장서 18책, 속장서 9책만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속분서 5책과 장서 50책 그리고 속장서 14책 등이 더 있습니다. 분서는 59세 이후 십여 년간 썼던 서간, 수필, 시 등을 모은 문집입니다. 장서는 춘추전국 시대에서 원대(元代)까지의 인물 800명을 다루어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입니다. 은퇴한 후 밥 먹고 앉아 책만 쓴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남들이 알아봐 주지 않을 거라고 여기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써야만 했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비슷한 기분으로 침울해집니다. 인터넷을 달달 뒤져 자료를 검색하고 정리하여 내 주제에 맞춰 배열하고 어구를 다듬으며 글을 쓰는 것이 힘들어 죽을 지경이면서도 재미집니다. 나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지만 누군가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분서와 장서는 나오자마자 당대의 베스트셀러였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은 요즘에만 아니라 이탁오 시대에도 유효했습니다. ‘이단’ 비난에 휩싸이며 찬성하는 이는 찬성하기 위해 반대하는 이는 반대하기 위해 읽었습니다. 이탁오는 분서를 펴낼 때 이미 “학자들이 내 책을 읽으면 나를 죽이려 들 터”이니 태워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책을 세상에 내놓았으니 이제 자기의 사상이 초래할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적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죽이면 그의 이름이 더욱 높아질 것을 염려했습니다. 무죄로 놔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이탁오는 분노했습니다.      


3월 15일, 여전히 두피가 가려웠나 봅니다. 이발사가 불려 옵니다. 이탁오는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자르고 그 칼로 목을 그어 목숨을 끊습니다. 누군가는 이탁오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시대가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면, 그는 ‘관목(灌木)’이 될 수는 있으나 ‘숲(叢林)’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이탁오의 책은 황제의 명으로 금서가 됩니다. 그 책들을 눈에 띄는 대로 다 걷어 한꺼번에 쌓아놓고 불 사르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행동이 개혁이지요. 개혁을 꿈꾸는 이들은 오랜 세월 은밀하게 이탁오를 읽어왔습니다. 우리의 연암도 그의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조선의 허균, 이언진, 정약용, 이건창이 이탁오를 읽었다고 하니까요. 1602년에 이탁오가 숨을 거두었어도 그의 금서들은 1780년 명성당서목에 실리어 여전히 읽히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나와 여러분이 또 읽고 있네요.      


70세에 이탁오가 쓴 시 「독서락(讀書樂)」입니다.      

성정을 편안하게 하고 정신을 기르는 것이 여기에 있다.

세계는 얼마나 좁으며, 네모난 책은 얼마나 넓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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