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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Oct 16. 2024

5. 기린이 기린이려면

-간이 최립

 오늘의 연암은 영화감독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프로필 카드를 집어 읽다가 감독의 왼쪽 눈 끄트머리가 힐끗 위로 올라갑니다. 이 캐릭터에 이 사람이 맞나, 하고 그려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 카드를 집어 들고 아까 그 장면에다가 다시 집어넣어 봅니다. 지금부터 만들어낼 한 세계의 주민으로 이 사람은 이 역할을 해줄 것이고 저 역할은 아무튼 누군가가 해줘야 합니다. 천지창조를 시작하기 이전의 창조주처럼 그 코에 호흡을 불어 넣어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나도록 만드려면 고심에 고심으로 피를 말려야 합니다. 그렇게 연암은 청나라 오랑캐에게서라도 좋은 점은 본받아 조선이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는 충동에 쫓기며 왜 내가 이런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가를 의아해 하며 열하일기의 등장인물들을 신중하게 섭외(?)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선정된 인물 중에 최간이가 있습니다. 호가 간이인 최립(1539.5.20.~1612.8.9)은 조선시대 선조 때의 문신입니다. 8대 명문장가의 한 사람이며, 외교 문서의 대가로, 명성이 중국에까지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그는《동의보감》을 쓴 허준과 명필로 알려진 석봉 한호의 절친이기도 합니다. 붓을 잡을 만한 나이에 글씨를 쓰고 시를 지으며 율곡의 문하에서 공부한 간이는 1555년(16세)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1561년(22세)에는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했습니다. 소년등과의 원조격인 율곡 문하에서 역시나 소년등과를 한 간이의 시문과 학식은 주위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1577년(38세)과 1581(42세)년 그리고 그 이후 두 번 더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명나라 인사들과 교유했을 터입니다. 조선의 임금에게조차 방자하게 굴었다는 명나라의 유황상도 간이의 글만큼은 손을 씻고, 향을 쏘인 후에 공손하고 경건하게 읽었다고 합니다.      


연암은 간이가 엄주 왕세정을 만난 일화를 전합니다. 간이는 산처럼 쌓인 공무를 순식간에 처리하는 엄주를 보고 경악합니다. 그 위에 그날은 오히려 한가한 날이었으며 엄주는 이미 시(詩) 만 수를 읊고 책 천(千) 권을 지었다는 호언을 듣게 됩니다. 이미 주눅이 잔뜩 든 간이는 자신의 글을 내놓고 가르침을 공손하게 청하지요. 엄주는 간이더러 독서량이 적고 견문이 좁으니〈획린해〉를 5백 번 읽어 글쓰기의 지름길을 찾으라고 합니다. <획린해(獲麟解)>는 기린을 알아주는 성인이 없음을 안타까워 했던 한유(768~824)의 작품입니다. 기린은 성인이 태어나면 나타난다는 동물입니다. 상상의 동물이라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B.C. 481년(71세)에 공자는 기린을 알아채고는, 어쩌다가 난세에 잘못 나타나 붙잡혔느냐고 슬퍼하며 <춘추>를 짓던 붓을 꺾었다고 합니다.      


왜 왕세정이 획린해를 콕 찍어 추천했을까요? 간이가 그 작품을 안 읽었을 리가 없습니다. 한때 한유를 좋아하여 본받으려고 했던 만큼, 한번 읽으면 몇백 번 읽고 외워야 끝나는 당시의 독서법에 비추어 보아 간이는 획린해를 줄줄 꿰고 있었을 터입니다. 그런 간이더러 획린해를 읽으라고 하며 더구나 독서량이 적고 견문이 좁다고 말하는 건 거의 모욕입니다. 이 이상 얼마나 더 해야 하느냐구요! 나라도 간이처럼 크게 부끄러워 하며 이 만남을 숨겼겠습니다. 천하는 넓고 읽을 책은 많으니 누군들 그걸 다 읽었다고 자신하겠습니까마는, 금수저가 아닌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느라 간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안 봐도 뻔합니다. 간이는 이반룡 스타일로 난삽하고 기이하게 글을 썼는데, 그것은 엄주가 두려워한 유일한 인물이 이반룡이었기 때문이라고 연암은 말합니다. 이쯤 되면 연암이 간이를 등장시킨 저의랑 이름이 아닌 호로 불러준 동기도 궁금해집니다.      


엄주에 대해서는 허균과의 일화도 있습니다.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도 계사년(1593년)에 태창까지 가서 엄주에게 배움을 청했답니다. 당시에 엄주는 은퇴하여 얼굴은 보통이나, 눈빛을 별같이 빛내며 정원에 별당을 짓고 제자와 벗을 불러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곤 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술 대여섯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누가 시문(詩文)을 달라고 하면 배경 음악을 깔고 바람처럼 재빠르게 글씨를 써냈답니다. 엄주는  시를 지을 때마다 이반룡의〈진관시〉를 소리높여 읊었습니다.      


푸른 용이 반쯤 걸리니 진나라 냇가에 비가 내리고 | 蒼龍遠掛秦天雨 

돌로 된 말이 길이 우니 한나라 정원에 바람이 불도다 | 石馬長嘶漢苑風      


연암은, 어떻게 이런 시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탄복합니다. 하지만 독자인 내 눈에 정작 들어오는 것은 제자들 앞에서도 이 시를 읊고 있는 엄주 자신입니다. 술로 지새우는 나날에도 눈이 별빛으로 빛났다는 이 남자는 아마도 이반룡의 장점을 되새기며 그 수준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다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별빛 눈망울을 가진 소년등과의 조선 영재를 만났을 때에도 그에게 진짜 해주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성인을 못 만났을지언정 너도 한 마리의 기린이 아니냐는 위로일 수도 있었을 터입니다. 줄곧 연기는 하고 있지만, 엄주는 그저 빛나는 조연일 따름입니다. 주인공은 간이입니다. 빛나지는 않으나 간이를 중심으로 열하일기의 세상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박지원 감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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