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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Oct 14. 2024

3. 친구의 친구도 사랑했네

7월 27일에 조선 사신단은 풍윤성에 도착합니다. 연암은 저녁 무렵에 절강 출신의 임고만납니다. 통성명을 하다 보니 박제가의 지인이네요. 임고는 이전에 박제가, 이덕무와 함께 문창루에 오르고 호형항의 집에 함께 묵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연암은 임고를 따라 호형항의 집으로 갔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 주인이 등불 네 개를 켜줬습니다. 그 불빛에 보니, 대청의 벽에 박제가가 이덕무의 시를 베껴 써 놨네요. 백로지(白鷺紙) 두 폭을 붙여 물 흐르는 듯 써놓은 글자가 두 손바닥 크기입니다. 박제가 자신의 시도 있으련만 굳이 이덕무의 시를 써놨어요.       


추일(秋日)독대경당집

쓸쓸한 가을 소식 저 나무가 먼저 아네 춥고 더움 다 잊으나 바보되고 말았구나

고요한 벽과 벽엔 벌레 소리 유난하곤 발 틈으로 새 한 마리 엿보기 일쑤러라

돈 벽일랑 버리거나 이 몸을 더럽힐 듯 나를 일러 서음이라 하니 이를 사양 않소

중국 것만 좋다 하여 부질없이 그리 마오 요봉은 문필이요 완정은 시라 하네     


이덕무는 간서치(看書癡)입니다. 조선의 국민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입니다. 바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바보였으나, 반복 학습의 위력에 힘입어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선비로 우뚝 선 인물입니다. 노상 자기가 들어왔던 ‘바보’라는 말을 자기의 시에서도 그는 거침없이 사용합니다. 백치(白癡), 서음(書淫-글 읽기를 지나치게 즐기는 사람)이 바로 그것입니다. 춥고 더움을 다 잊어 바보가 된 것도 여전히 책만 보느라 그랬을 것입니다. 박제가는 이덕무의 시를 즐기기도 했겠지만,  조선이 중화의 문물을 참 좋아할 정도로 수준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나 봐요.     


저녁 식사 후에 연암은 다시 호형항의 집에 들릅니다. 호형항은 이미 집안에 술과 과일을 마련해 두었어요. 임고는 박제가와 이덕무의 안부를 묻더니, 그들을 맑고 탁 트인 높은 선비라고 칭송합니다. 연암은 그들을 자신의 문하생이라 부르면서 제자들의 재주가 보잘 것없다고 스승이나 할 법한 겸손한 말로 대답합니다. 재상의 문하에서 재상이 나고 장수의 문하에서 장수가 나는 법이라, 문하생들이 그 정도면 연암 또한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는 칭찬이 되돌아옵니다. 유쾌한 티키타카입니다. 임고와 호형항은 지금 연암에게 하듯 박제가와 이덕무에게도 정성껏 대접했을 겁니다. 연암은 그들과 함께 술을 몇 잔씩이나 마십니다.      


박제가와 이덕무는 불과 2년 전인 1778년에 여기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렇게 다녀온 이야기들을 조선에 되돌아오면 보고회로 나누었습니다. 함께 중국 이야기를 할 때면 연암은 부질없이 부러워 애를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 몇 년 사이에 차례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중국 여행을 하게 되었네요. 하물며 만 리 밖 남의 나라에서 이제 이덕무의 시를 박제가의 글씨로 보고 있습니다. 내가 서울에 살 때 이덕무가 지은 시로구나,  하고 연암은 마치 친구의 얼굴을 보듯, 주인이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손가락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어루만졌을 것입니다.      


임고와 호형항은 글을 전혀 모릅니다. 호형항은 생김새가 전아하지 못하고 시정잡배의 티가 납니다. 임고는 수염이 아름답고 점잖아도 말을 주고받을 때는 천상 장사꾼이고요. 그래도 이덕무와 박제가가 가리지 않고 벗을 삼았습니다. 박제가가 중국말을 할 줄 알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호형항이 송하선인도를, 임고가 그림 부채를 선물로 내밉니다. 연암도 부채 하나와 청심환 한 알을 각각 답례로 주었습니다. 연암은 말을 모르고 그들은 글을 몰라, 소통이 길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연암은 이내 숙소로 돌아와 받은 생강과 국화차, 귤병을 푹 달여 소주와 섞어 몇 잔 마셨습니다. 맛이 좋아요.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좋은 벗은 좋은 차의 맛을 냅니다.       


연경의 유리창에서 처음 본 유세기의 눈매는 맑고 눈썹은 길었습니다. 연암은 유세기를 보자마자 앞서 중국에 온 이들이 사귄 선비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만나본 적도 없는 그들의 이름이 이미 입에 올리면 향기롭고 그 수염이나 눈썹이 눈에 선하였기 때문입니다. 풍윤성에서는 풍윤성의 벗이, 연경 유리창에서는 유리창의 벗이, 만나면 박제가와 이덕무의 안부를 묻고 자기의 글을 보여주고 심지어 책도 공동으로 저술합니다.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깊은 우정과 의리의 네트워크를 짓는 연암이 21세기에도 더할 나위없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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