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은 유리창의 육일재에서 황포 유세기를 만났습니다. 유세기를 반정균, 이조원, 축덕린 곽지환 중의 하나는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름과 얼굴이 눈에 보듯 선한 인물들이니 만나기도 전부터 사랑에 빠져버린 운명의 상대인 셈입니다. 이렇게 글로벌하고도 가상공간에서나 볼 법한 벗도 세상에는 없지 않나 봅니다. 알고 보니 황포는 연암이 처음으로 만나 통성명을 하고 길게 필담을 나눌만한 중국인 벗입니다. 연암은 혜풍 유득공의 시를 소개했습니다.
이름난 시인으로 곽집환이 있어
부친 담원에 대한 시가 동국에 널리 퍼졌네
지금까지 삼 년 동안 소식이 감감하니
유유한 고향 분수 물가의 모습 꿈속에 서늘하네
황포는, ’곽집환‘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곽집환은 중국 사람으로 산서 태원 출신입니다. 건륭 병인년(1746년)에 났으며,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부유한 집안의 인물입니다. 산을 뒤에 지고 대문 앞에 시냇물이 흐르는 집-담원에서 그의 아버지 태봉은 명사들과 더불어 시를 주고받았답니다. 홍대용이 사행 길에 만난 등사민의 친구에요. 곽집환은 자기의 문집인 <회성원집>에 실을 서문과 아울러, 담원을 노래한 시를 써달라고 조선의 선비들에게 요청했습니다. 유득공과 박제가 그리고 연암이 참여했지요. 영조 49년(1773)의 일입니다. 연암은 담원의 내청각과 감영지, 소심거와 송음정, 비하루와 유춘동, 소월대와 어화헌을 읊어 담원팔영을 지었습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 글을 써주다니, 참 연암은 글로벌 우정의 소유자입니다.
연암의 담원팔영을 포함한 여러 시들이 <회성원집>이라는 이름으로 책이 되었습니다. 홍대용이 1776년 사행길에 받아 왔습니다. 회성원시집 간행본입니다. 서문을 써달라기에 말에, 연암은 일단 자기의 시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시와 서문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시들이 모두 맑고도 속기가 없습니다. 연암은 자기도 모르게 속이 뜨겁게 달아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서문을 써줄 수 있었지요.
서문에서 연암은 붕우는 주선인(周旋人)이자 제이오(第二吾)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벗은 한집에 살지 않는 아내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
만리 밖에, 얼굴은 못 봤어도
동갑내기에 도(道)도 비슷한
봉규의 시(詩)는 성대하다!
장편은 소호 풍악
단편은 옥이 부딪치듯
낙수의 놀란 기러기요
동정호에 낙엽 지는 소리라
언어는 다르나 문자는 같으니,
같이 즐거워 웃고 슬퍼 울며
후인(後人)과 선인(先人) 벗을 웃으리
제이오(第二吾)라는 말은 연암도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을 읽었음을 보여줍 니다. 연암의 절친 이덕무도 이렇게 씁니다. “한 사람의 지기를 얻는다면 나는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여, 오십 일에 다섯 빛깔을 이루리라.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아내에게 백 번 단련한 금침으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아 달라고 하리라.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달아 아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사이에 펼쳐놓고 마주하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참 끼리끼리 노는군요.
황포가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없는 유리창거리 문수당 서점에도 그 책이 없다네요. 회성원 시초(詩抄)는 11년전 건륭 34년(1769년)에 방춘각 각본으로 이미 나왔습니다. 책이 나온지 6년만(1775년)에 곽집환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은 나중에야 전해 들었습니다. 한번 나온 책이니 재판각한 중간본이 있을 법도 한데 유리창에 없다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곽집환, 그의 시 세계는 맑고 깨끗하여 불우한 선비의 기상이 많고 온화함이 적더니, 그러려고 그랬나 봅니다. 봉규는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떠나 버렸습니다.책이라는 가상공간에서나 볼 수 있는 깔끔한 인물이었나 봅니다.어쩌자고 혼자만 신선이 되어 훌훌 떠난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