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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Oct 11. 2024

2. 황제의 어찬을 나도 맛봤네

열하일기를 읽으며 인상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조선 사신들이 황제만 보러 가면 뭐가 생기는 거에요. 청나라 궁궐에서는 진짜 꼭두새벽에 업무가 시작됩니다. 그 시간에 일을 시작하여 식사 때가 되면 황제가 수라를 드십니다. 그리고 그 상의 음식을 내려주면 그게 사신들의 아침식사가 되지요. 때로는 다른 물품도 받곤 합니다. 이렇게 아랫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이것저것을 챙겨주려면 황제라는 직업도 그리 만만치는 않은 자리입니다. 이번에는 사신들에게 황제가 여지즙을 내렸습니다. 통관이 분명히 ‘차’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서장관은 굳이 ‘술’이라고 합니다. 누런 비단으로 주둥이를 봉한 것이 황봉주 같다네요. 통관의 말을 무시했다기보다는 이 탐스러운 액체가 술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인 게죠. 다들 한 잔씩을 마시고는 정말 맛좋은 술이라고 호들갑을 떱니다.

      

내가 보기에는 황제가 외국 사신들에게 술을 내렸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매실나무 열매를 바라보며 갈증을 푸는 심정이라 술인양 했을 거에요. 조선에서 같으면 아내들한테 정성어린 약주들을 받아 자실 분들이 객지에서 참, 먹고픈 술도 마음껏 못 먹고 24시간 시간 초과근무를 하고들 있습니다. 남자도 세상살이가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로군요. 역시나 술 좋아하는 연암은 술이 맛있다고 취기가 도는 체하는 그들 앞에서는 ‘술 아닌 것 같다’는 깨는 소리는 안 합니다. ‘내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데, 알콜 도수도 알아 맞출 경지에 도달했구만, 이걸 못 알아 맞추겠어’, 라고 속으로나 말했겠지요.      


새벽에 기려천이 산보를 하다가 멀리서 연암을 부릅니다. 바로 쫓아가니, 누런 비단으로 봉한 것을 맛이나 보자고 합니다. 황제가 조선 사신들에게 뭘 하사하는 것은 봤는데 무엇인지는 몰랐나 봐요. ‘맛보자’고 하는 것이 으레 받아 버릇했으니만큼 먹거리인 줄은 압니다. 연암은 숙소에 들어가 모난 호리병을 기울여 봅니다. 한 잔쯤 남았네요. 손수 그 잔을 쥐고 기려천에게 돌아갑니다. 연암이 그 잔을 넘겨주니 여천이 말합니다. 여지즙이라고요. ”여지는 나무에서 딴 지 하루만 되면 즉시 향과 색이 변하니까 꿀에 재어두는 법“이라네요. 자기는 북경에서 여러 번 하사받았고 어제도 받았다고 합니다.      


기려천은 잔 하나를 꺼내어 소주 대여섯 잔과 남은 여지즙을 섞어 휘젔습니다. 여지즙 특유의 달콤쌉싸름한 향내가 확 퍼졌겠지요. 매운 맛이 술기운을 얻어 더욱 은은한 향내를 드러냅니다. 여천의 권유를 받아 마셔보니 맑은 향기가 입에 그득하게 퍼지며 달고 시원합니다. 연암이 잔을 돌려 권하니, 여천은 사양합니다. 불계를 좇아 술을 끊었다는 겁니다. 뭔지 모를 때는 맛 좀 보자더니 여지즙이니까 맛을 볼 필요가 없잖아요? 애주가 연암을 위해 물어보지도 않고 곧장 소주를 섞네요. 얼떨결에 연암은 여지즙 술 한 잔으로 아침을 열었네요. 크으~ 와인 한 모금만 머금으면 신들린 무녀가 신탁을 툭툭 내뱉듯 시를 읊어대는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의 인물처럼 연암도 시 한수가 흘러나오지 않았을까, 기대가 되는데요.      


여천은 귀주 안찰사로 재직 중입니다. 항상 여지를 먹는다네요. 전라도 사람은 입만 열면 곧장 시가 된다고 하잖아요? 중국 사람도 입만 열면 시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날마다 여지 300개를 먹으니 이제 영남 사람이 다 되었구나(원문에는 매일 여지 300개를 먹으니 길이길이 영남사람 되어도 사양하지 않겠다로 되어 있음) 라는 소동파의 시를 기려천이 곧장 읊조립니다. 예전에는 귀양지였던 영남지방에 유명한 문인 소동파도 귀양을 갔답니다. 맛있는 여지를 날마다 먹으니 귀양이 안풀려도 괜찮다는 시를 지었네요. 여천은 황제의 여지즙을 여러 번 받아 마셨습니다. 물론 소주는 안 섞었을 터이구요.      


그런데 여천은 마시지도 않는 소주를 왜 지니고 다녔을까요? 연암은 중국 여행에 나서며 사람을 만나고 벗을 사귀기 위해 청심환을 준비했었지요. 인맥을 넓히려면 무언가 손에 쥐어 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꼭 필요하니까요. 황제 또한 그런 이유로 어찬을 아랫사람들에게 계속 내리고 여천도 소주를 지참했을 테지요. 그래서 연암과도 교유를 할 수 있었을 것이구요. 자, 그러니 우리의 사귐이 돈독해지기 위해, 오늘 점심에 뭐 먹을까요?  장터에 있는 함지박 식당의 추어탕이 맛있다던데 그거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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