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대는 5일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말발굽에 밞힌 발이 퉁퉁 부어 신음합니다. 열하에 빨리 갈 생각 밖에는, 아니 만리장성에 빨리 갈 생각 밖에는 없던 연암입니다. 무릇 아랫것이란 웃전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지 웃전이 아랫것을 보살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창대가 아파 죽겠다고 하니까 연암의 첫 반응이 견마잡이가 없어 낭패라는 겁니다. 연암이 승마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보면 그는 말을 탈 줄 압니다. 그러나 견마잡이가 없이 말을 타면 안 되는 양반이기 때문에 낭패라는 생각부터 드는 겁니다. 문화라는 것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습니다.
한걸음도 옮기지 못하는 애를 중도에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기어서 따라오라고 합니다. 중도에 떨어뜨려 놨구만, 뭐. 잔인하기 짝이 없다고 본인도 인정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에 비긴다면 연암은 자기의 말에 창대를 태웠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대한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당한 자를 돕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그냥 지나가듯 연암도 황제의 만수절에 대기 위해 창대를 놔두고 스스로 고삐를 잡아 달려갑니다. 이 물을,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아픈 창대가 맨몸으로 건너는구나, 라고 의식하면서.
오르막길이 많아지고 물결은 더욱 사나워집니다. 연암은 여차하면 정사와 가마를 함께 타기도 하며 제맘대로 뭘 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연암은 더 찾지 않고 창대는 부사의 가마에 매달려 울고 서장관에게도 호소합니다. 연암이 이미 고북하에 도착해 있는데 부사와 서장관이 창대의 딱한 꼴을 전합니다. 이윽고 창대가 엉금엉금 기어서 도착하는데, 중간에 말을 얻어 탔답니다. 남도 도와주는데 주인인 도리로 나 몰라라 해야겠느냐. 연암은 지갑을 엽니다. 200닢과 청심환 다섯 알을 주고 나귀를 세내어 창대를 태웠습니다. 뭐니 뭐니해도 역시 금융치유가 최고입니다.
연암이 서둘렀던 것에는 황제의 생신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리장성의 성벽에 글씨를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언제부터 여기에다가 글을 쓰리라고 맘먹고 왔거든요. 먼저 칼을 뽑아 벽돌에 낀 이끼를 긁어냅니다. 필통에서 필기도구를 꺼냅니다. 먹을 갈아야 하는데 둘러봐도 물이 안 보이네요. 아까 남겨 놓은 술을 벼루에 쏟습니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갑니다. 찬 이슬이 내립니다.술과 이슬, 별빛으로 된 먹물에 붓을 적셔서 글씨를 씁니다. 지난번에는 사호석에 쓰더니 이번에는 만리장성에 씁니다. 글씨는 먹물 또는 잉크, 심지어 피로도 쓰지만, 별빛과 술과 이슬로 쓴 글씨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한번 베껴보고픈 멋진 체험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연암이 그 우아한 취미생활을 하는 대신 창대를 돌볼 수는 없었을까요? 나의 친정엄마는 우표수집을 하셨답니다. 우표 수집은 미사용 우표 그것도 시트로 되어 있는 세트를 더 높게 쳐줍니다. 엄마는 사용하지도 않을 우표를 사느라 애를 썼습니다. 집에 돈이 없어 힘든데 여자인 엄마가 오직 자기만을 위해 돈을 쓰는 건 범죄에 버금갑니다. 엄마의 유일한 사치를 자녀들이라도 공감해주었을까요? 천만에요. 그렇게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았습니다. 연암이 창대를 돌보는 것이 내 친정엄마의 취미생활과 비슷했을 겁니다. 조선사회에서는 한번 종인 자는 영원히 종이었으니까요. 종은 비단옷을 입으면 몰매를 맞고 기와집을 지으면 감옥에 갑니다. 서정주 시인이나 되니까 자기가 종의 자식이라고 커밍아웃을 했지요. 문화란 이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