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좀 쓴다고 하면 별별 것을 써달라는 청탁이 들어옵니다. 성탄절에는 성탄축하 행사 진행 멘트를 써야 합니다. 교회가 설립 사십 주년 기념 문집을 내기로 하면 여러 사람이 쓴 글을 받아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교정보는 것도 내 몫입니다. 지인이 자기소개서를 부탁하는가 하면 글을 못 쓴다고 설레설레 마다하는 이는 말을 시켜놓고 녹음을 하여 녹음을 풀어야 합니다. 교회 홈페이지를 제작할 때는 자기 부서(?)의 소갯말도 써야 합니다. 안면이 있는 지인들의 청탁이라 얼굴을 봐서라도 거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일한 불평은 제발 좀 일찍 말해주면 안돼?, 이거죠!
그런데 연암은 이름도 모르는 이의 원고 청탁을 받습니다. 홍대용의 중국 벗의 벗인, 봉규 곽집환으로부터요. 곽집환은 문집을 만드려고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거처가 담원인데요, 아버지는 담원에 벗들을 모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곤 하셨답니다. 아들 곽집환은 담원을 기리는 시를 가지고 아버지의 장수를 비는 한편 담원의 아름다움을 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조선 선비 여럿이 그 문집에 자기의 시들을 실었어요. 연암도 담원팔영을 짓습니다. 그 여덟 수 중에서 여섯번째인 유춘동(留春洞)- ‘봄이 머무르는 골짜기’-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상춘곡'(常 항상 상/春 봄 춘/谷 골 곡)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어요. 그런데 '상춘곡'은 봄이 저절로 계속되는 반면, '유춘동'은 떠날 수도 있는 봄이 안 떠나고 머무르도록 뭔가를 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동사를 맨 앞에 배치하여 봄한테 머무르라고 명령하는 느낌도 들구요. 그리고 ‘곡’이 계곡이라는 말로 쓰이며 ‘동’에 비해 좀 더 넓은 공간을 가리키는가 하면 유춘동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손질하여 만들어낸 정원으로 '동'이 '동굴'로 자주 쓰이는 것이 골짜기보다는 더 작은 공간인가 봐요.
1. 첫 줄-화사장귀강만빈 花似將歸强挽賓-花 꽃 화/似-같을 사-닮다/將 장차 장악-하려 한다/歸 돌아갈 귀-돌려보내다, 반환하다/强 굳셀 강-굳세다/挽 당길 만-잡아당겨 못하게 하다/賓 손 빈
* 다음 네 개의 해석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와닿습니까?
1) 꽃은 간절하게 붙잡아도 돌아가려고만 하는 손님이네 2) 꽃은 하도 은근하여 가는 임을 붙드는 듯
3) 돌아가려는 손님 억지로 붙잡듯 꽃이 오래 지지 않도록 4) 꽃은 흡사 가려는 손 억지로 잡아 논 듯한데
2. 둘째 줄-촉타풍우반봉진 囑他風雨反逢嗔-囑 부탁할 촉-맡기다/他 다를 타-다른/風 바람 풍-바람 불다/雨 비 우/反 되돌릴 반-뒤집(엎)다/逢 만날 봉-맞다, 영합하다/嗔 성낼 진
1) 그 비바람에게 부탁해 봐도 도리어 봉변만 당하네 2) 비바람 어이하여 도리어 새우는고 3) 바람과 비에게 부탁을 하다가 도리어 핀잔만 들었네 4) 비바람에게 불지 말라 당부했다가 되려 꾸짖음만 당했다오
3. 셋째 줄-자종동이수병사 自從洞裏修甁史-自 스스로 자/從 좇을 종-나아가다/洞 골 동-골짜기 동굴/裏 속 이-가운데, 안/修 닦을 수-고치다/甁 병 병-항아리/史 역사 사-기록 문서
1) 몸소 계곡 안으로 따라가 꽃을 병에 고쳐 꽂네 2) 골짝 꽃 꺾어다가 화병에 모셔 두니
3) 골짜기 안에 핀 꽃들을 월별로 품평을 한다면 4) 두어라 골짝에서 병사(甁史)를 익힌 이래로
1) 삼백육십일은 날이면 날마다 봄이라고 인정하네 2) 일년 삼백 육십 날이 어느 때가 봄 아니랴
3) 일년 삼백 육십 일 모두 봄이로세 4) 삼백이라 예순 날이 모두 다 봄이로세
(네 개의 해석 중에 제 해석도 들어 있답니다. 몇 번인지 맞춰 보실래요? ㅋㅋㅋㅋ)
불평은 불평으로 끝납니다. 일찍 말해주면 안돼?, 하고 투덜거리면 그 보답으로 더 일찍 말해주는 게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얼른 들이밀어 입을 막아버리는 것으로 끝나기 일쑤니까요. 연암이 조선인 벗의, 중국인 벗의 벗의 청탁을 받아들여 담원팔영을 썼어도, 출판은 되었으나 절판된 듯합니다. 내 글도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글을 쓰렵니다. 연암의 안타까운 마음에 공감도 해보며, 유춘동도 음미해보고, 2024년을 연암으로 꽉꽉 채우기 위해.(그런데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 본 적 없는 장소를 시로 읊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