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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Oct 12. 2020

오래된 편지를 읽는다

ST. 뻬제르부르끄에서 날아온 추억을 읽는다.

일 년 열두 달  중의 가장 처절하다는 4월의 햇살이  교정의 벤치에 내리비칠 때  때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렇게 정재는 나에게 다가왔다.

나를 보자 걸음을 멈추고 나서 주머니에서 하얀 편지 한 통을 내민다.

누나한테 온 편지예요

나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그 편지를 받아 들었다.

"누군데? "

"A요"

A는 정재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작년에 복학을 하고 난 후 졸업을 하고 나서 재학생들이 가는 러시아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가는 대열에 끼여 러시아를 간 친구였다.



구내매점은 많은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러 갑자기 내려간 매점은 아직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데 좀 전에 교실에서 본 낯익은 무리들이 내 뒤에 서 있다.

" 야!  니들 우리 과에 30대 아줌마 들어온 거 알아? "

특유의 감으로 아무래도 내 말을 하고 있는 듯한데 그들은 아직 그 소문의 주인공이 나인지 모르고 있는 거 같았다.

내 차례가 지나고 물건을 사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학과 학생과는 다른 일정이었다. 학교가 춘천에 자리하고 있어서 방을 얻어 하숙을 해야 했다. 나는  아직 일을 하고 있어서 서울 생활도 병행해야 해서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학교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이 학교를 택한 것도 있었기에 일반학생들에게는 차별로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다른 학생들이 생각하기에는 특혜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교수님들의 엄청난 배려를 받고 있었다.


내가 학교로 들어온 그 시간대에 그 친구는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한 상태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의 하숙집은 이미 아이들의 밥을 먹는 장소가 되어서 무리를 지어서 나의 집에 밥을 먹으러 오기도 했다. 누구는 쌀을 들고 오고 하여튼 나의 하숙집은 그들의 아지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들에겐 누나 같은 이미지였지 않았나 싶었다.

어딜 가나 나는 밥  잘 사 주는 누나였다.

그때 이 친구도 그 무리에 끼여 있었는데 말없이 수줍게 밥만 먹어서  눈이 가지 않던 친구였다.

그렇게 가랑비에 옷깃이 젖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내 주위에 있었던 그 친구는 어느새 내 곁에 있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시험이 끝나길 말없이 기다렸다가 같이 집을 가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시험기간 동안 먼저 시험을 보고 난 후,  같은 교양과목의 정보를 가져다주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밤을 같이 새워주던 친구였다. 시험이 끝나고 난 후의 술자리가 생기면 항상 그 친구의 옆자리는 내 자리였다.

 남동생이 누나를 챙기듯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친구와 나는 무려 5살이 넘는 나이차가 있었다.

누나 치고도 한참이나 위인 셈이었는데....


어느 날 한가하게 하숙집에 쉬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그 친구가 문 밖에 서있었다.

한 손엔 맥주를 사들고...

아직까지 누군가가 내 하숙집에 혼자 그것도 남자가 혼자서 들어온다는 것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라서 내겐  너무 어색했다.

나와 맥주 한 잔 하고 싶어서 왔다는 이 친구가 앉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또 다른 후배 여학생이 전화를 걸어 우리 집에 와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나는 내심 안심했다.

어느덧 술자리는 내가 빠진 둘의 술자리가 되어 있었다. 그 날 이 후배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그의 고백을 들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친구는 학교에서 아주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좋은 집안에 훤칠한 외모와 부담스럽지 않은 성격 덕에 남학생에게도 여학생에게도 무난하게 인기가 많은 친구였는데 알고 보니 나와 비슷한 것들이 많았다.

교정에서 잡담을 나누는 시간에 "나 누나 동네에서 아주 많이 봤어요" 하고 말을  하는데, 나는 이 친구를 본적도 기억도 나질 않았다.

알고 보니 내가 다니는 서대문 성당을 다니고 있었고, 같은 동네는 아니지만 옆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다니는 독서실이 알고 보니 경희 동네에 있는 그 유명한 능수 도서실이었는데, 그 앞에서 내가 애들을  괴롭히고 있는 걸 보았다고 놀리곤 했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경희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였던 모양이었다.

남녀가 서로 비슷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관심이 가기에는 충분했다.

어쨌든 그 소리를 듣고 그 친구가 더 관심이 간 것도 사실이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그때 나에게는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아마 그 친구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 많은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를 좋아하기엔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고, 남자 친구가 있던 나에게도 나이차 많이 나는 연하남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지만 그 친구도 나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는 건 남녀 간의 인지상정이 아닐까?

방학이 되어서 서울로 내려간 그 친구와는 달리 나는 이미 남자 친구와는 헤어진 상태였다.

대학원을 들어가기 위해서 학점을 일찍 채워서 졸업을 해야 했기에 여름방학에도 학교에 남아 계속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이 친구도 여자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고, 상황은 나는 애인이 없는 혼자인 상태가 되었고, 그 친구 옆에는 이미 다른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남자 친구와 헤어진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 친구는 러시아에 가게 되고,  나는 그 프로그램을 신청하지 않아 같이 합류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친구를 통해서 들은 사실이지만,   그때 내가 같이 러시아에 갔으면 아마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거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을 때 내심 안타까웠다.

 아! 타이밍이란 게 이런 거구나...



편지 내용은 이렇다 할 내용은 없었다.

그저 잘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안부나 자신의 근황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억나는 마지막 말 한마디는 아직도 내 마음속의 아린 문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누나!!! 많이 보고 싶어요!!!!


나를 학교에서 처음 보자마자 자신의 가방을 내 옆자리에 던져놓고 말없이 나가서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들어왔다고 나중에서야 고백했던 나만큼이나 미련했던 친구이지 싶었다. 그때부터 이미 좋아했었다고 이야기했었는데 나는 이 친구에게 직접적으로는 한  번도 좋아한단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번이라도 미리 말을  해보지... 아니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미리 말을 할 걸 그랬나?

내 나이가 조금만 더 어렸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뻔뻔스러웠더라면 지금쯤 나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그때 누구보다 더 보고 싶었었는데........


이렇게 나의 처절하고 아름다웠던 청춘의 기억들은 지나갔다.

바람처럼 지나간 젊은 날의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그 지나간 자리 자리마다 내 마음속의 어딘가에 구석구석 작은 못처럼 박혀있다. 하나하나 상기시킬 때마다 그 상처의 자리는 가슴이 저리지만, 그 자리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삶의 고단함이 덮쳐 버렸어도, 내 마음에 남아있는 청춘의 기억들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늙어감에 대한 도피처가 되어 주어, 남아있는 내 삶에 윤활유가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소중하고 찬란한 청춘의 기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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