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짠내 가득한 송도 앞바다의 한 횟집에서 김전무와 나는 마주 앉았다. 얼굴은 태연한 척 했지만, 내 가슴속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 날 부산에서 만난 김전무의 그 냉정한 모습과는 달리 오늘의 김전무는, 그 말라비틀어진 신경질적인 몸에서 나오는 서늘한 기운보다는, 옆집 오빠 같은 힘없는 다른 모습의 기운으로 앉아있었다.
나를 무너뜨리겠다는 사람 치고는 내가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오히려 온화함 마저 느끼게 하는 기운까지도 풍기고 있었다.
나는 냉정함도 있었지만, 동시에 막내딸 특유의 애교와 남을 요절 복절 하게 웃기기도 하는 타고난 유머감각도 많았던 사람이라, 앉자마자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겨드랑이에 걸치고 있던 등록판을 내려놓으며 무겁다고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실은 내가 이렇게 많이 차를 팔았다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나의 속내를 감추고 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무님! 내가 그렇게 미웠어요?"
"솔직히 나 같은 여자애한테 500백만 원 주기 아까웠죠?
거기다 인센티브까지 주려니 얼마나 아까웠을까?"
"그냥 나 같은 애 하나 어디서 데려다가 앉혀 놓으면 사업이 저절로 될 것 같았죠?"
" 언어는 사업을 하는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긴 하지만 그 언어를 구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능력이라는 걸 전무님은 눈뜨고도 못 봤네"
"그 일대에 나보다 러시아말 잘하는 사람들 천지에 깔렸어요
나 같은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나보다도 하수네 ㅎㅎㅎㅎ"
나의 깐죽거림이 밉지 않았던지 김전무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솔직하게 말한다.
네 말이 다 맞았다고 자기가 판단 미스를 했다고.... 그래서 후회한다고,
내가 나가고 나서 내 사업이 승승장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너무 미웠단다. 김과장과 이소장까지도 너를 따라 나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고...
너를 무너뜨리고 싶었던 마음도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처낸 사람의 성공을 보고 있기에는 그 사람도 사업가였다.
그래서 더 속이 시렸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자기 것을 뺏긴 건 마냥, 처음부터 자기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도 애송이 같은 여자아이한테....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자기를 말리던 사람이 첫날 박상무와 같이 서울에 내려왔던, 나를 보고 서울 물은 역시 다르다고 난리를 쳤던 그 김 과장이었단다. 사실 그는 김전무가 가장 아끼던 오른팔이었는데 그 안에서 김전무 다음으로 실세였다. 그는 내가 카라반 시절 바이어를 데리고 부산에 내려가면 바이어와 함께 온 나를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다. 개인적인 사심도 적지 않게 들어간 것도 같았고... 그 상남자 같은 남자가 내 앞에서는 이상하게 들떠보였다. 그 남자의 수줍음이 냉정한 나의 눈에도 보였었다.
피곤함에 절어 원래도 좋아하지 않던 노래방을 데려가 접대를 했는데, 그 시끄러운 노래방 안의 뒷자리서 자고 있는 나를 보고 술이 아닌 잠을 깨기 위한 사이다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살다 살다 노래방에서 자는 여자는 처음 봤다고..
또 한 번 반했으려나... ㅎㅎㅎㅎ
그 험한 남자들 세계에서 보기 힘든 흔하지 않은 여자인 나를 그들의 세계로부터 보호하는 느낌이 그때도 아주 강했었다.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기라도 하듯, 거친 그의 부하직원들은 나에게 순한 양처럼 무척 깍듯하게 굴었다.
그때의 박상무는 사기치다 걸려 자신의 회사를 차려서 나간 후였다.
이렇듯 세상의 사람들은 예의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이 보이는 겉내와 속으로는 각자의 이문과 각자의 실속을 생각하기에 바쁜 보이지 않는 속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등에 비수를 꽂은 사람 앞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음으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수 뒤에는 반드시 화합이 필요했다. 그것이 어찌 보면 더 큰 복수의 그림이 아닌가 싶었다.
나와 그는 서로 다른 이익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같은 자리에 서지는 못했지만,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관계의 유지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주 중요했다.
개인적으로 틀어진 사적인 감정은 오히려 화해의 손길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왜냐면 한 번 삐뚤어진 사적인 감정이 다시 돌아오기는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이 관계한 사업상의 이득에 의해 무너진 사이는 또 이득 앞에 얼마든지 뭉쳐질 수 있는 것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비열한 세상이기도 했다.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은 적지의 영역에 겁 없이 걸어 들어오는 나는, 그에게 더 이상 어린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나를 자신과 동등한 사업상의 파트너로 인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서울에서의 사업은 접었지만, 그는 아직도 부산에서는 건재했고 그의 사업에 나와의 협업은 반드시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내 뒤의 러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수많은 바이어의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아무튼 어제의 죽고 죽이고 싶게 만든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평화로운 그와의 식사를 끝으로, 그저 그런 식상한 복수가 아닌 그의 가슴의 염장을 지른 진정한 복수를 하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김전무는 나와 헤어지는 순간에 네가 만약에 남자였다면 절대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