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by kseniya

첫 월급을 받고 난 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데도 인센티브에 대한 말은 온 데 간데없고, 오히려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나를 감시하는 일 빼고는 할 일이 딱히 없던 김전무의 동서는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행보가 평상시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성균관대 러시아과를 나왔다는 여자가 그 사람 앞에 붙기 시작했다.

한 사무실에 두 파가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기도 안 찬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 여자는 나의 영역이 아니었다. 오더를 그녀와 내가 나뉘어서 받는 상황이 생겨났다.

이것은 누가 봐도 나에 대한 도발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나를 짓밟는 행위였다. 분명 능구렁이 같은 김 전무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일 것이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나는 참아야 했다. 감정대로 움직일 일이 아니었다.

밤이 되면 분함으로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나의 행로를 고민해야 했다. 나 혼자만의 행로가 더 이상 아녔기에 결단을 내리기에는 많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급기야는 김 전무의 동서는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김 전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교묘하게 나의 전화를 피했다.

불편한 기류가 사무실에 퍼져 나갔고 밤에 드디어 나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자 모두 나의 행동에 따르겠다고 결정만 하라고 했다.

사샤는 너 혼자서도 얼마든지 꾸려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나에게 믿음을 주었고, 종원이 역시 누나가 결정만 하면 그 결정에 따르겠다고 약속을 했다. 나에게 더욱 힘을 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김 과장이었다.

내가 결정만 한다면 나의 편에 서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본 나의 행보를 봐서는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고 자신감을 실어 주었다. 이 소장도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대세의 흐름이 어느 곳으로 흐르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세상의 닳고 닳은 사람들이었다.



긴 고민 끝에 나의 결심은 굳어졌다.

이제 거침없는 나의 행동력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실 속으로는 엄청나게 겁이 났다. 그는 내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거물급이었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수많은 경험 속에 묻어난 능구렁이 같은 약은 수를 나는 이길 수가 없었다.

나의 아버지와 나보다도 기가 센 나의 오빠를 대동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내가 동네 날라리들에게 까불다 얻어맞고 온 날, 내 동생 건드린 놈들 다 죽여 버리겠다고 부엌에서 식칼 들고나가서 동네 날라리들을 평정시키고 들어 온 나의 오빠.. 둘이 동네를 나가면 찬바람이 생생 불 정도로 나와 오빠는 기가 셌다.

도대체 파리 새끼 한 마리도 살생하는 법이 없는 아버지 속에서 어떻게 이런 자식들이 나왔는지 울 아버지 속깨나 탔었겠다. 이런 나의 아버지는 내가 걱정이 되어 김 전무에게 전할 손편지를 써서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드디어 나타난 김 전무!!!

그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내가 달려올 것이라는 걸 이미 눈치를 챈 것이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두말 안 하고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나를 택하든지 그들을 택하던지...

그런 식으로 두 패가 나뉘어서 일을 한다는 것은 나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김 전무는 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의 얼굴에서 의미 없는 빈 말임을 이내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일단 알았다고 했다. 그 삼일의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젊잖은 나의 아버지를 보고 놀랜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런 선비 같은 아버지에게서 너 같은 대찬 딸이 나온 줄 모르겠다고... 욕인지 칭찬인지


서울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종원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모든 서류가 들어 있는 컴퓨터를 락을 하고 나서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컴퓨터를 가지고 그 사무실을 조용히 나오라고 말했다. 모든 결과를 예상한 종원이는 다른 사람에게 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조심히 내려오라는 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나의 오빠는 그 날 나를 보고 김전무의 눈에서 살기를 느꼈다고 보통 사람이 아닌데 네가 저 사람을 상대한 거 자체가 놀라울 정도라고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이다.

그 사람의 인생이나 나의 인생이나 한 번인 것이다.

나는 조용히 모멸감을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나의 온몸이 떨렸다. 두고 봐라 내가 너를 보기 좋게 밟아 줄 때가 있을 것이다.


서울로 내려오자마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나의 결단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이미 그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오빠를 통해서 나의 사업장을 알아보라 하고 마지막 단계에 싸인만 남았다.

그러나 미쳐 내가 한 발 늦게 대처하는 동안 그들은 나의 컴에 들어있던 러시아어 서류를 이미 빼돌린 상태였다.

그 당시 부산에서는 서류를 러시아어로 하지 않고 영어로 작성하던 시기였어서, 사실 이 서류는 엄청나게 중요한 사업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것을 나는 빼앗겼다.

꼬리 없는 백여우가 능구렁이에게 당한 것이다.

나는 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막상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러시아말 밖에 없을 것 같은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 오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기에는 그 돈이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거기에 인센티브까지 주기에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그 당시 시장은 사무실만 열어 놓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냥 걸려들어서라도 사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말을 좀 하는 직원을 뽑아서 천불 정도 줘도 사업은 운영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능구렁이가 돈에 눈이 멀어 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것이다.

지나친 욕심에 간과한 그의 실수의 결과는 그 날의 모멸감을 배로 같아주고도 남을 나의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함을 선사했다.


부산을 다녀온 그다음 날 아침, 내가 만들어 놓은 카라반이라는 사무실에는 나를 비롯한 나와 관계된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도, 물건도, 그 어떤 정도......

카라반에는 오로지 그들의 사람들로 오붓하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