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기싸움이 시작되다.

동네 싸움에서 일어나는 그런 기싸움이 아니었다.

by kseniya

사무실이 난리가 났다.

원 사장은 나를 향해 그렇게 크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나의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회유도 했다. 네가 원하는 조건을 다 들어줄 테니 계속 회사에 남아 달라는 이유였다.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사실 다른 곳에 있었다.

원 사장은 나를 자신의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은 어리숙한 사람인 자신의 처남에게 나 같은 똑 부러진 여자가 필요하다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수동의 강이 보이는 30평대의 아파트를 결혼선물로 주겠다고도 했다. 잠시 흔들리기는 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혹하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삶이 고단할 때 나의 마음을 괴롭힐 만큼 달콤한 유혹이었다. 세월이 훌쩍 지난 후에도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볼 때마다 생각나게 하는 딜이기도 했었다. 만약 이 딜을 내가 수긍하고 받아들였다면 지금의 나의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져 있을까?

그러나 그 당시 이미 나는 통속적인 남녀 간의 사랑에 울고불고할 보통의 여자의 처지가 아니었다. 매형의 사무실이라는 이유로 자주 들나들던 내가 본 그 어리숙한 남자는 내 눈에 들어오기에는 작은 떨림 조차도 없었다.


후에 사적인 장소에서 그 당시 수자원 공사를 다니던 원 사장의 막역한 친구들이 나에게 원 사장은 네가 원하기만 하면 회사를 차려 줄 수도 있는 사람이니 잘 보이라는 식으로 나를 말렸다. 이 말 안에는 단순히 순수한 의도만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뭘 잘 보이라는 말인가? 왜 내가 원 사장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돈이 많다는 이유로 왜 내가 그에게 잘 보여야 하는가? 그지 같은 갑질에 굴복하기 싫었다. 살면서 그 그지 같은 갑질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몰랐던 나는 세상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순수했다.

강남을 비롯해 서울 도심의 요지에 널려 있던 몇 개의 건물주였던 그의 재산은 내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런 사람과의 인연을 대차게 끊은 나는 세상의 둘도 없는 바보였다.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라고 위로할 수밖에...


드디어 그 대단하다는 김 전무가 직접 나를 보러 서울로 행차하셨다. 소문과는 딴판인 서늘한 미남이 앉아있었다. 가벼이 볼 수 없는 인상이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입을 여니 목소리가 또 환상적이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과 그를 보는 나의 눈이 바빴다.

서로의 보이지 않는 숨 막히는 기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서로의 발톱을 숨긴 채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부산에서의 러시아 무역이 서울로 옮겨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제까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부산시장은 점점 서울시장의 규모가 커지자 눈에 띄게 매출이 줄어들었던 시기였다. 반면 서울의 러시아 시장은 가격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나를 필두로 많은 회사들이 업종을 자동차로 바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정도로 러시아의 자동차 수출사업은 위협적이었다. 달러의 영향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전무의 눈에 내가 들어온 것이었다.

내수시장의 침체로 수많은 서민들이 고통의 한숨으로 한국사회가 어두워져 갈 무렵, 내 영역은 불화산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같은 곳에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의 딜은 이러했다.

김 전무는 서울에 자신의 지사를 세우고 싶다고 했다. 사람이 필요한데 그 일을 나에게 맡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첫 월급은 500만 원에 그에 부수적으로 이어지는 사업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사실 자동차 무역은 차 자체만으로 수입이 되었지만 그에 따른 부수적인 사업들이 가해지면 그 외의 인센티브도 무시를 하지 못했다. 그들이 차를 사 갈 때 그 차에 맞는 부품이나 그 차를 운송하는데 필요한 운송비등 여러 가지 파생되는 사업들이 또 존재했다.


이번엔 나의 딜이 시작됐다.

생각은 해 보겠지만 전반적인 사업에 대한 운영권과 사무실에 필요한 인력은 내 사람으로 채울 수 있게 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그 조건이 부합되지 않으면 딜은 없던 걸로 하겠다고 했다.

돈은 나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에게는 내가 데리고 있던 내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옆에는 나와 함께 가야 할 나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촌인 사샤를 비롯해 내 업무의 잔일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친구도 내가 잘 알고 있던 숙미였다.

사실 이 문제는 쉽지 않은 문제로 주도권이 누구에게 넘어가느냐의 문제이기도 했고, 회사의 보안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쉬운 딜이 아니었다.

내가 제안한 딜의 의미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당시 판도는 주도권이 나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그의 사업은 진행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부산에서의 안정된 사업장을 버리고 서울로 자신의 거처를 완전히 옮겨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전무는 여우 같은 사업가였지만 지나친 욕심이 문제였다.


첫 번째 딜은 나의 승리처럼 보였다.

비즈니스의 거물과 비즈니스의 애송이와의 기싸움에서 내가 이기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딜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실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 뒤에 숨어 있는 무서운 세력까지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장난이 아닌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나의 형부가 말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린 나의 운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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