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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Aug 11. 2020

내가 기억하는 그는 아직도 24살 청년이다.

찬란했던 청춘에  영원히 머문 그에게  늦은 안부를 묻는다.

늦은 가을비가 추륵추륵 내리던 10월의 끝무렵이었다. 남자 친구의 ROTC 후배가 학교 앞 도서관에서 우리를 보고  황급히 달려 나온다. 그의 얼굴은 말하지 않아도 뭔가  상치 않음을 느낄 정도로 침울해 보였다. 왠지 어물쩡 어물쩡 거리는  후배의 입에서 그 친구의 얘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기대할만한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느 정도 침묵이 흐르고 난 후 후배가 입을 떼기 시작했다.

선배님!!! 아무개  선배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후의 말은 들리지가 않았다.

우린 오싹한 냉기를 느낌과 동시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한눈에 봐도  집안에서 사랑받고 랐을 정도로 샌님 같았던 그 친구는  어리숙하면서도 깍쟁이 같은 을 다 가지고 있는 어느 집 귀한 아들이었다.

ROTC 파티에서 처음 본 구였는데 나를 보자마자  자기소개를 먼저 했던 구였다. 그렇게  남자 친구의 구로 알게  후로 남자 친구를 만날 때 항상 같이 어울리던 친구였다. 같이 어울려 다니던 4명의 친구 중 눈이 높아서 그런가 그때까지도 여자 친구가 없었던  그에게 내 어릴 적 친구를 소개해 주었지만,  인연이 아닌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항상 우리랑 어울려 같이 놀던 사이였다.


 수업이 겹치는 날은 학교에서 마주치면  학교 도서관 후문에 가까운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고  학교 안에 있는 매점에서  자판기 커피 하나 들고 수다 떨던 시절이었다. 늦은 오후 동기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하면 단골 주점에서 그 수다를 또 이어가는 생활들이 반복되던 시간들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일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별할 것 없는 일상이 그저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처럼 쉽게 만남을 약속하고 그런 시절이 아녔어서 의례히 가던 곳에서 각자의 일을 마치고 학교 앞 단골 주점에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면 술자리는 시작이 다.

나에 비하면 고민이랄 것도 없을 것 같은 이 청춘들도 미래의 불안함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모이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이런저런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에서 가장 란한 시기기도 하지만 가장 불안한 시기이기도 한 청춘들이니까 말이다.

 


  술자리가 시작되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달아올라 그 분위기에 취해 있을 때 이 친구가 엄마에 대한 얘기를 아련하게 꺼냈다.  불문학을 전공한  엄마가  항상   매일 저녁 잠들 무렵  자신의 이마에 프렌치 키스를 해 주었다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시 보통의 엄마들은 희생적이긴 했으나 그렇게 아들의 마에 입맞춤을 해줄 정도로 삶이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 말 한마디에 엄마에 대한 아들의 사랑이 느껴졌고 , 아들에 대한 엄마의 귀한 사랑이 느껴지던 날이었다..

매일 프렌치 키스를 해 준다는  그 친구 엄마가 참 인상적이었다.

사랑받고 잘 자란 친구구나 싶어 내심 부러웠다.

그는 엄마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집안에 대한 부심도 상당히 강했다. 우리가 어보지 않아도 아버지의 직업과 삼촌에 대한 배경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는데 대단한 집안이긴 했다.

그때 우린 그가 재수 없었지만 내심 부럽기도 했다. 앞으로 졸업 후 소위 임관식을 마치면 각자 부임할 자대 배치에  혹시 그 빽으로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같은 동기들이 부러우면서도 겉으로는 무심척했다.




삶은 때론 우리가 예측한 데로 흘러가진 않았다.

그 친구가 그 험하고 힘들다는 화천 이기자 부대에 배치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대 배치 결과를 알고 나서 우리들 적잖이 놀랬다. 샌님 같은 그와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그 악명 높은 곳에 그가 자대 배치를 받은 것이다.  삼촌의 빽도 안 통했나 싶어 속으론 좀 쌤통이다 싶었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소위 임관식을 마치고 논산 훈련소떠나는 날  용산역에서 배웅을 할 때까지만 해도 갓 사귄 여자 친구와 함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웠던 그 친구의 환하게 웃던 미소가 지금도 떠오른다.  고생이라고는 모를 것 같았던 그의 우윳빛 얼굴은 그 날 따라 더 하얘 보였다.

 환한  미소를 뒤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열차에 오르던  그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빗물에  이리저리 흩날리던 낙엽들이 왜 이리 을씨년스러운지 마치 내 뒤에 그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등골이 오싹했다.

정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승에서의 은 인연이나마 아쉬운 작별을 하려나 싶은 생각이 니 무서움과 서글픔이 겹쳐 울고 싶어 졌다.

그 뒤로 일주일 후에 남자 친구는 부대에서 내려오는 소식지에서 자신의 친구 이름을 보았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구의 그 허망한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단다. 그런데 선명하게 찍힌 이름 석자를 보고 나서 그 죽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단다. 친한 친구의 죽음을  신문에 찍힌 글자를 보고 나서야 확인을 한 셈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친구가 아니었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소문은 많았지만 어쨌든   촉망받던 젊은 청춘의 죽음어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안타까웠다.

그와 어울리던 친구들은 한동안  우울했지만 산 사람은 또 살아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듯이 , 이 흐를수록  남은 사람들의 상은 그 친구 하나 빠졌다고 라지는 건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그의 죽음은  잊혀갔다.

매년 돌아오는 늦은 가을날 문득 떠오르는 거 말고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는지 아들의 죽음을 세상 밖으로 알리고 싶지 않았는지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는 소리는 못 들어본 거 같다. 아마도 가족끼리 조용히 치렀을 듯싶었다.

그 친구의 죽음이 생각날 때마다 그의 엄마가 같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엄마가 궁금했다. 그렇게 귀한 자식을 잃고 지금쯤 그 엄만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슴이 아픈 건 당연하지만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고 계실지 궁금했다. 남아있는 자식을 위해 어떻게든 살아가시겠지만 다 키워놓은 자식을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보낸 어미의 심정은 그렇게 헤아리기 쉬운 심정은 아닐 것 같다.

몇 해 전에 세월호 사건이 어났을 때 그  젊디 젊은 아아들의 억울한 죽음이 너무 비통해 날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우울했지만 , 그 진도 앞바다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자식들 앞에서 하염없이 애간장을 녹이던 그 부모들이 더 가슴 아파 한 달을 울어도 그  울분은 가시지가 않았었다. 남의 자식인데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내 자식은 말해 뭐할까..

남의 부모지만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그 상상이 말도 못 하는 슬픔이란 걸 알기에 더더욱 그랬던 거 같다.


짧은  인연 긴 여운..

그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짧은 인연으로 만나 가장 큰 비극 죽음으로서  여운을 남겨준 친구..

내가 그보다 30년을 더 살았고 더 살아가겠지만

"살아보니 그때 그 시절이 참 좋았더라" 고 말하면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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