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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Oct 13. 2022

가을을 태우다

온몸에 나무 타는 냄새가 었다.


지난 여름바람에 쓰러졌던 옆집 이웃인 오드리 집의 나무들을 자르고 난 후, 그  나무더미들을 이제야 치우기 시작했다. 원래 나무는 오드리 집의 소유였지만,  나무가 쓰러진 곳이 우리 집 쪽이라서 쓰러진 나무의 책임은 우리가 져야 했다. 처음엔 그 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법은 자연재해로 쓰러진 나무의 책임은 나무가 쓰러진 곳의 소유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워낙 나무의 크기가 상당해서 잘린 나무들의 잔재만으로도 숲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앞에 나 있는 작은 도랑길도 막힐 정도였다. 나뭇가지들이 치워지고 나면 도랑과 연결된 또 하나의 커다란 숲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작은 숲으로 들어오면 마치 세상과 절된 느낌의 오롯이 숲 속의 고요함만이 느낄 수 있어서 내가  참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숲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무질서한 물건들은 이 숲의  주인의 숨길수 없는 게으름이다. 작년 여름에 만들어 놓은 화덕도   제 구실도 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오늘 제대로 날을 잡았다. 이 많은 나무들을 화덕에 넣어 태워 버릴 것이다.

 이런 행위들은 차를 타고 5분만 나가면,  온갖 세상의 이로운 인프라들이 구성된 살기 좋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원시적인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치이기도 하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이틀 전 기사에 미국에서 살기 좋은 도시로 이곳 조지아 애틀랜타가 1위로 뽑혔다. 그 수많은 살기 좋은 도시 중에 이곳이 뽑혔다는 사실에 정작 이곳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그 기사의 사실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많고 많은 부유한 도시를 제치고 남부의 도시가 뽑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

 집값 대비 편리한 도시의 점들을 생각해보면 적당한 비용으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가장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닌가 싶다.

나의 주관적인 상황만 보아도 적은 돈으로 엄청난 호사를 누리고 있기에 말이다. 나의 낡은 집이 그 기사의 순위에 일조했을 리 만무하겠지만,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농가 주택이기에 이 호사를 누리는 것도 사실이다.

뭐하나 부족할 것 없는 도시에서 나만의 숲으로 숨어들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이 도시의 이중적인 모습은 이곳저곳을 돌아 돌아 마침내 나의 이상향에 다다른 느낌마저 든다.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떨어지는 낙엽들이 노랗게 물들어 간다. 열흘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메마르고 가지가 서서히 마르기 시작해 잦은 바람에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른 나뭇가지는 불을 태울 때 연기가 나지 않으므로 불을 때기가 좋은 땔감을 제공해 준다.

어제까지 미친 듯이 여기저기 자신들의 영역을 풀어헤쳐 놓은 기세 등등했던 잡풀들은, 이제 앙상하게 말라 자신들의 최후의 임무인 자손을 번식시킬 씨를 맺어놓고 자신들이 왔던 곳인 흙으로 되돌아 가려한다. 나무들 역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나하나 화덕 속으로 던져진다.

봄에 싱싱하게 피어났던 자연들이 이제 또 내년의 생명을 위해 한 해를 불살르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들이다.


나무를 태우는 일은 이 집 남자들 중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 이 흔하지 않은  노동은 오롯이 여자들의 몫이다. 엄마가 나무를 자르면 그 나무를 넣기 좋게 불구덩이에 쑤셔 넣는 것은 딸의 몫이다.


엄마 혼자 이 힘겨운 노동을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딸은 보다 못해 친구들과의 수다를 멈추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사실 나는 이 나무 태우는 일을 노동이라기보다는 감성 놀이라고 생각하는데  딸의 눈에는 엄마의 고생으로 보이는가 보다.

둘만의 대화 없이 루어진 불장난은 나무의 절반을 채우고 나서야 멈춰진다.

실질적인 노동이  끝난 후, 이제부터 진짜 감성이 시작된다.

나무를 태우고 난 재의 불길이 살아 있는 화덕에 둘러앉아 이 정원에서 접 키운 꽃으로 만들어진 꽃차를 준비하고 불 앞에 둘이 앉아 몽롱하게 피워 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일명 불멍,,,

아무 생각 없이 불길만 바라보는 고요함의 판, 그러나 그 고요함은 아무리 그립다고 외치고 발버둥을 쳐도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불러온다. 그립고 그리운 그 시절.

기억은 아직도 20년 전에 머물러 있고, 현실은 20년을 훌쩍 지나,  방금 뾰족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져 까진 팔꿈치와 무릎이 욱신욱신 거리는 세월을 거스르지 않는 초라한 몸이 된 초로의 여인네의 모습만이 있다.


한참을 바라보고 난 불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엄마로 돌아와 있었다.

딱 좋게 달 구워진 불의 위력을 보니 그동안 너무 소원했던 아이들의 먹을거리가 생각났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나온 타임과 오레가노를 뜯어다 올리브 오일에 버무려  숯불에 스테이크를 구워주었다.

보기 좋게 익은 고기에서 나온 육질의 부드러움에 나의 노고가 누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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