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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Aug 24. 2022

잡초의 두 얼굴.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위대함



 처음 집을 사서 들어왔을 때,  원시상태의 다듬어지지 않은 집은  미친 여자가 바람나 정신없는 것처럼 무방비 상태였다. 오죽하면 딸이 우리 집은 할로윈 장식을 따로 할 필요 없이 그냥 나둬도 귀신 나올 것 같다고도 했을까? 우리가 이사를 들어오고 나서도 큰돈을 들이지 않는 한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무를 뽑고 , 자질구레한 잡초들을 뽑아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반복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잘 정돈된 다른 집들 사이의 불균형은 이웃들의 원성을 사기에 이르렀고, 앞마당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나무  일곱 그루를  자르기로 결심했다. 나무를 사서 심는 것만큼이나 나무를 자르는데도 거금을 들여야 하는 현실에 막상 나무를  자르려니, 어느 정도 망설여진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은  위가 시작되면 남부의 혹독한 여름 로부터 사람이 견딜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도저히 에어컨 바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이곳에서 인공의 바람이 없이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가을이 되면 이 구역 최고의 가을 단풍을 만들어 주었기에 가을 단풍이 사라질  내년의 가을이 올 것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무를 베어버리지 않으면 앞마당을 손을 쓸 수가 없어 아쉬운 결단을 내리고 나무  일곱 그루를 모두 베어버렸다. 나무를 베어버리고 나니 이제까지 나무 가지들에 가려져 있던 초라하고 작은 내 집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무들로 인해 그 강한 햇빛의 존재를 모르고 자주 내리는 비를 머금고 자라난 이끼들 대신 숨어있던 잔디들이 하나둘씩  방해꾼들이 사라지자, 여기저기 자신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무들이 내 초라한 집을 가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잔디 씨는 백 년 가까이 살아있다는 소리가 실로 실감 나는 순간들이었다. 그늘지고 습했던 앞마당은 드디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해를 정면으로 받는 곳으로 음지에서 양지가 되어 있었다. 양지가 되었다는 것은 식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양분인 햇빛이  든다는 소리다. 일곱 그루의 나무가 사라지니, 가뜩이나 넓은 앞마당이 시베리아 벌판처럼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집에서의 무료한 일상은 평상시  눈여겨보지 않던 사소한 것들에게도 눈길이 가게 만드는 경우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도 길가에 뒹굴어져 있는 고목나무 껍질 하나에도 눈길이  저절로 가진다.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듯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일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지고 대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사람의 진실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게 살지도 은 내 나이에, 사람들의 처음 순간인 첫인상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나 요즘같은 세상엔 관상이 그다지 들어맞지도 않은 세상이니 더 이상관상에 메여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늦봄이 되자,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들의 가치를 제일 먼저 알아달라는 듯이 서서히 올라오는 잡초들의 새로운 시각이 그렇다. 사실 잡초라고 말하기도 미안하다.

이름모를 들판에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홀로 피어나 자신들의 자리를 넓혀가는 그들에게 누군가는 잡초라기 보다는 어여쁜 이름인 야생초하고 불러 주는것이 좋겠다고 한 사람들도 있다.



이제껏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발밑에 나뒹굴어져 있는 야생초들...

시간이 남아돌자 너도 나도 하고 있는 유튜브를 나도 하루 종일 틀어놓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러다, 우연히 한국의 야생화들과 산나물들을 소개해주는 유튜브에 빠져 버렸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이  시골 산천이나 남들이 들어가지 않는 깊은 계곡까지 애써 찾아가는  야생초들이 우리 집 앞마당에서 봐 왔던 그 잡초들이었단 사실이었다.


티브이를 보고 바로 문을 열고 나가면 방금 그들이 소개했던 야생초들이 나의 바로 앞마당에서 삐죽삐죽 자라나고 있었다. 너무나도 신기한 현상이었다. 잡초들은 나를 밖으로 불러내어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숲 주변에 철문 담장을 타고  자라고 있는 인동덩굴, 눈여겨보지 않아서 인동초의 꽃이  처음엔 하얗게 피었다가 노랗게 변해서 금은화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렸다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꽃은 흰색 노란색이 섞여서 피며 자신이  금은화라고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나는 은은한 재스민 향기를 품어내는 주인공이 이 인동초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둘씩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니 이 또한 신기한 매력으로 다가오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빠지게 되었다.

비슷한 소재의 유튜브를 번갈아 찾아보면서 집숲에서 자라고 있는 잡초를 찾아내는 기쁨은 또 다른 설렘이었다. 잡초 하나 발견하는 일이 이렇게 즐겁고 설레는 일일까?


 우리가 알고 있던 잡초, 그 잡초의 이면에는 밟아도 밟아도 살아 꿈틀대며 자신들의 종족 번식을 멈추지 않는, 그 강한 생명력이 사람의 생명에 도움이 되는  이로운 성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설렘이 그리 과장된 것도 아닌 듯 싶다.


나는 지금 잡초를 하나하나 공부해 나갈 것이다.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러나 하겠지만,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이로운 식물들을 알아가고 싶은 것이다. 잡초보다도 못한 인간은 사실 잡초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아는 것도 잡초에게 미안한 일이다. 잡초만큼만 되어도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진 않을 텐데....



그중에 대표적인 잡초이자 약초인 광대나물...

어딜 가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잡초이자 약초이다.

생긴 것이 너무나도 앙증맞게 이쁘게 생긴 광대나물

광대가 입고있는 옷의 칼라처럼 빙 둘러 나오는 잎의 생김과 닮았다해서 광대 나물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잡초는, 사람에게 이로운 생약성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식물이면서 스스로 땅에 이로운 식물로 여러 유튜브에서 소개되는 식물이기도 하다. 나물로도 먹을 수 있고, 여성들의 골다공증에 좋아 어떤 이는 말려서 가루를 내어 복용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문만 열면 보이는 광대나물은 아쉽게도 우리 집에서는 군락을 이루고 피어나지는 않아서 아직까지 맛을 보지는 못했다. 내년 봄에 씨를 받아 군락을 이룰 정도로 키워보고 싶지만 , 잡초가 잡초가 아닌 게 자연적으로 자기들끼리 씨를 흩날려서 자라는 경우가 아닌, 인간의 손으로 인공적으로 자리를 옮기면 이상하게 그 강한 생명력이 우습게도 버티지를 못하고 시들어 버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사람의 손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이리저리 뒹굴면서 자라는 자유분방한 자신들의 삶을 방해하는 인간의 손을 거부하면서 말이다.  잡초들 은근히 고집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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