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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Aug 03. 2020

 지나간 사랑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이 좋았더라

사람들은 말한다. 지나간 사랑은 깨끗하게 잊고 살라고. 그러나 그것은 그 시절의 내 모습까지도 잊어버리고 살으라는 얘기 아닌가... 그 시절, 꽤 아팠지만 눈부시게 아름답던 한 시절을 내 인생에서 지우라니....

지나간 사랑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젊은 시절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다르게 지나간 사랑에 대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사그라들지 않는  감정을 닌 채 안타까운 별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그 아픈 상처가 덧날까 봐 애써 억을 외면하며 살아가지만,  후자는 날씨가 좋은 어느 날  창 밖이나 푸르른 하늘을 볼 때 무심코 꺼내어지는 그리움으로 가오는 기억일 것이다.

오늘 창밖으로 보이는 날씨가 유난히 참 맑다.  




 중학교 시절, 그 당시는 구소련인 지금의 러시아는 아직 공산체제가 무너지기 이전이었다. 그 시절 어린 중학생에게 러시아는  소설 속에서 나오는 그 희뿌연 안개 같은 알 수 없는 회색빛 분위기에 이끌려 막연하게  동경하는 곳이 되었고, 그  영향으로  나의 대학 희망 학과  1순위는 항상 러시아어과가 되었다. 그러나  인생은 쉽게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3년 연속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말았다.

연거푸 대학입시에 낙방을 하고  나서, 삶에 대한 희열도 욕구도 없이 방황하던 시기에 우연히 러시아에 인연이 닿아 그곳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90년대 중반 모든 것이 풍족하고 자유로웠던 한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공산국가의 폐허가 그대로 드러나 밥 한 끼 해 먹는 것이 정말 삶의 치열한 현장이었지만,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던 시대였다. 그 안에서 사람들과의 정, 광활하고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으로 이어진 가로수길, 고사리를 뜯어다 삶아서 말려 겨우내 저장식품으로 만들어 집 안 지하실의 은밀한 장소는 모든 겨울 음식이 저장되어 있었다.  여름 내내 앞마당에서 감자부터 양배추까지 안 나오는 것들이 없고,  땀 흘리고 난 후의 러시아 맥주 한 잔 들이켜고 나면 세상 시름이 다 없어지는 시절이었다.


일 년 중 반이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는 볼 거라고는 회색빛 바랜 낡아빠진 집들이 띄엄띄엄 엄청난 크기로 일렬로 늘어선 이 곳에서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한 남자.

우연히 여름날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매끈하고 곧은 등줄기를 보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 됐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썼던 그 날 이후,  서로가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가슴만 애태우던 시간들...   머리엔 온통 그의 모습으로 가득 차고 가슴은 항상 두근두근하던 시절이었다.


일반 가정집엔 수도시설이나 목욕탕이 없어 아는 언니의 개인 아파트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밖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이미 무릎을 덮고도 남아 웬만한 곳은 제 허리까지도 들어가던 그 날,

 해는 이미 지고 빛바랜 가로등이 은은하게 하얀 눈빛을 비출 때,   마음은 온통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혹시 그가 와 주기를 기다리던 순간, 문 앞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그의 뒷모습에서 설레던 그때의 모습이 떠 오른다.

얼마를 기다렸는지 얼굴은 이미 칼바람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되돌아가려고 하는 그 찰나,  나를 보고 희미하게 그의 얼굴에서 희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얼마나 설레던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당시의 설레던 감정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하얀 눈밭의 그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이어지면서 뚝 끊긴 그곳에 서 있던 그의 뒷모습!!! 아......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들어간 바로 그다음 날 삼풍사건이 터졌다.  세상은 온통  한국에서 일어난 이 말도 안 되는 비극적인 소식을 각국의 뉴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티브이  뉴스를 통해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혹시나 제가 그곳에 있었을까 봐 노심초사했다는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서 들었을 때 서로에 대한 감정은 정말이지  절정에 이르렀다.

친구와의 동행길에 기꺼이 나를 데리고 고사리를 따러 가는 길은 그야말로 시베리아의 자작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장관을 내게 선사했고,  세심하게 그곳에 사는 치명적인  벌레가 들어가지 않도록 나의 옷매무새를 단단히 고쳐주던 따뜻한 그의 손.... 내가 다니던 학교와 가까운 곳에 그가 일하는 일터가 있어서 저의 일행과 우연히 마주치면 서로 손을 흔들어 주며 서로만이 아는 미소로 서로에게 화답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가슴 아픈 사랑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 각자의 가정에서 충실하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삶이 무료해질 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각나는 젊은 날의 나의 소중한 사랑,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씁쓸하게 한 번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그를 남기고 돌아오는 순간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통곡을 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나를 아프게 한다.

어느 한 날 나의 꿈에 나타나 잘 있으라는 한마디 남기고 사라진 그 여운 뒤에,  혹시라도 그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나 싶지만,  알 길이 없어 그저 잘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인지라...... 나를 참 많이 좋아해 주었던 사람, 그것도 아낌없이 그저 사심 없이 좋아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와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었기에 현실을 쫒아 멀어져 가는 나를 보고 말없이 눈물 흘리는 남자. 그 남자의 눈물을 보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지만 할 수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가야만 했던 나의 심정...


그는 알까?

살면서 문득문득 내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사랑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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