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활주로에서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며 나는 매일 같은 벽에 부딪혔다.
교실 속 영어는 살아 있는 새가 아니라, 종이에 박제된 나비 같았다.
문법 문제는 척척 풀어내면서도, 외국인을 앞에 두면 입술이 굳어버리는 아이들.
입시는 절실했고, 말하기는 사치처럼 밀려났다.
나는 그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랜 시간을 미국에서 살다 한국으로 돌아온 내가, 두 세상의 공기를 다 느껴본 사람이었으니까.
시험지 위의 영어와 거리에서 부딪히는 영어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그래서 딸에게만큼은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험점수에 매달린 언어가 아니라, 삶을 넓혀주는 언어를 배우게 하고 싶었다.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웃음과 숨결이 담긴 대화를 익히게 하고 싶었다.
“날개를 크게 펴자.”
우리가 셋이 머리를 맞대고 그 말을 꺼냈을 때, 순간은 희망의 느낌표로 빛났다.
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물음표가 따라왔다.
정말 우리가 잘하는 결정인가?
남편은 우리를 미국까지 데려다주었다.
집을 알아보고, 딸 방 벽에 별 스티커를 붙이며 웃었다.
"이제 둘이 여기서 잘 지내!"
그리고 모든 걸 정리한 뒤,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흔들며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알았다. 그 웃음 뒤에 가족을 챙기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무대가 한국에 묶여 있다는 복잡한 그림자가 숨어 있음을.
남편이 떠난 후, 그가 정리해 둔 집은 예뻤지만 허전했다.
미국에서 HR 일을 하며 이력서 검토하고 면접 잡느라 정신없는 날들.
영상 통화로 "오늘 촬영 어땠어?"물으면, 그는 "늘 정신없지" 하며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화면 너머, 혼자 마시는 커피 잔과 빈 소파가 전부였다.
"난 기러기가 아니라 독수리야. 언제든 날아갈 수 있어."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목소리엔 무력감이 스며 있었다.
기러기 아빠 생활이 외로움으로, 심지어 우울증이나 돌연사의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웃음소리에 잠시 안심하면서도, 걱정으로 밤이면 잠을 설쳤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두 대륙으로 갈라졌다.
화면 속 남편은 늘 지쳐 있었고, 나 역시 HR 일에 치이며 하루를 버텼다.
딸은 씩씩했지만, 아빠 얘기가 나오면 눈빛이 흔들렸다.
한 번은 영상 통화 중 아빠가 "곧 갈게"라고 하자, 딸이 조용히 "언제?"라고 되묻는 모습이 가슴을 찔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실제는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비행기 같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저녁.
유난히 긴 겨울밤을 자랑하는 미국.
해가 일찍 져 오후 다섯 시 인데도 거리는 깊은 밤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도 부엌도 복도도 어두웠다.
"순간 집에 아무도 없나? 딸이 어디 갔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나는 급히 딸 이름을 불러보았다.
대답 대신 계단을 올라가자, 딸 방 문틈으로 새어 나온 불빛 아래,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숙제를 하는 딸이 보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연필을 쥐고 책에 몰두한 모습.
책상 위 작은 스탠드만 켜져 있고, 강아지는 딸 발치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제야 숨을 내쉬며 문틀에 기대섰다.
하지만 그 어두운 집은 여전히 텅 빈 우주 같았고, 딸의 방 불빛은 외로운 별처럼 떠 있었다.
나는 그 아래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우리가 원한 삶이 이건가? 이게 우리가 꿈꾸던 날개였나?"
물음표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그날의 어둠은 내 안에 오래 남았다.
가족이란 함께 웃고, 울고, 같은 지붕 아래서 온기를 나누는 것 아니던가.
그렇다고 삶이 곧바로 바뀐 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남편은 1년에 한두 번씩 미국에 와서 우리 곁을 지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짧은 재회는 서로를 달래주는 순간이었지만, 공항의 이별은 늘 아프게 남았다. 우리는 매일 영상 통화로 서로의 하루를 이어 붙이며 살았다.
남편은 프로그램을 마치고 바쁜 일이 끝날 때면 미국에 왔다 갔다 하며 균형을 맞추려 애썼다. 딸의 고등학교 졸업식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가능하면 함께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각자의 자리에서 최대한 버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모습은 언젠가 스스로를 "독수리"라고 불렀던 말에 걸맞았다. 그는 외로운 기러기가 아니라, 끝내 가족을 향해 날아드는 독수리였다. 긴 비행 끝에라도 반드시 우리 곁에 내려앉으려는 그의 날갯짓 덕분에, 우리 가족은 완전히 흩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덮쳤다.
세상이 멈춘 듯한 그 시기, 하늘길조차 닫히면서 남편은 자연스레 미국에 머물게 되었다. 오가는 선택지가 사라지자,우리는 처음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오래 머물 수 있었다. 낯설 만큼 길어진 그 시간 속에서, 가족의 숨결이 다시 집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결심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같이 살아야 한다고.
날개는 따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함께 펼칠 때 가장 웅장하다.
우리가 찾던 느낌표는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같은 집 불빛 아래서 이어가는 삶이었다.
무지개가 걸린 저녁 산책길, 네 식구의 발걸음에 희망이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