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도, 딸도, 그리고 나도
저녁 시간, 부엌은 의외로 분주했다.
남편이 프라이팬을 능숙하게 흔들며 요리를 하고,
나는 의자에 앉아 음식이 완성되기를 느긋이 기다렸다.
남편은 원래 요리를 잘했다.
칼질은 여전하고, 양념 비율은 언제나 정확하다.
딸이 함께 살 때나 지금이나, 그의 밥상은 늘 한결같이 맛있다.
달라진 건 딱 두 가지, 이제 그 맛을 가장 자주 누리는 사람이 나라는 것과, 내가 점점 더 게을러졌다는 것뿐이다.
식탁에 앉아 요리를 기다리며, 문득 생각했다.
'이제야 진짜 여유를 알아가는 걸까.'
딸이 떠난 집은 터무니없이 조용했다.
매일 "오늘 뭐 먹어?"라며 툭 던지던 딸의 목소리,
냉장고 문을 쾅쾅 여닫던 작은 소음들.
그 모든 게 사라지자 집 안은 낯선 고요로 채워졌다.
처음엔 그 정적이 어색했지만, 곧 우리 부부에게
"이제 너희 차례야." 하고 속삭이는 공간이 되었다.
그 고요 속에서 우리의 대화는 조금씩 길어졌다.
TV 뉴스를 보다 말고 옛날 얘기로 흘러가거나,
세상 돌아가는 일로 밤이 깊어지기도 했다.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딸이 채우던 식탁은 다시 우리 둘의 무대가 되었다.
그 위엔 음식보다 말과 웃음이 더 풍성히 놓였다.
그 웃음은 잘 볶아진 묵직한 원두처럼 깊고 진한 향을 뿜었다.
그렇게 우리는 둘만의 리듬을 다시 찾아갔다.
아침엔 커피 향과 빵 굽는 향이 집 안을 감쌌다.
주말 저녁엔 추억의 발라드를 들으며 와인을 한 모금씩 나누었다.
신혼 때로 돌아간 듯한 여유가 생겼다.
아니, 그때보다 더 느긋한, 우리만의 속도가 생겼다.
하지만 인생은 늘 그렇다.
편안함에 젖으려는 순간, 새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새로운 일자리 제안이었다.
조건은 훌륭했고, 업무도 익숙했지만, 낯선 도시로 떠나야 했다.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출퇴근은 꿈도 못 꿀 거리였다.
차로 두 시간, 왕복 네 시간.
지도 위 숫자보다 마음으론 더 멀게 느껴졌다.
'주말부부'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편이 기러기(자칭 독수리) 아빠로 날아다니던 시절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젠 우리가 주말마다 서로를 찾아 운전대를 잡는다니.
하다 하다 주말부부라니—인생이 이렇게 이동식일 줄이야.
참, 인생은 새 챕터를 던지는 데 망설임이 없다.
이번 선택은 가족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늘 '가족'이라는 중심에 서 있었다.
회사에서의 결정도, 집안의 자잘한 선택도 결국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랜만에 나 자신과 마주 앉았다.
마치 오래된 서랍 속 낡은 사진을 꺼내 보는 기분이었다.
며칠을 망설였다.
종이에 장단점을 적어보았다.
익숙한 곳에 머무는 건 편안한 아메리카노 같았다.
새로운 도시로 떠나는 건, 강렬한 에스프레소처럼 도전적이었다.
어느 쪽도 선뜻 답을 주지 않았다.
머릿속은 저울처럼 흔들렸지만, 결국 그 추를 움직이는 건 내 마음이었다.
결국 남편에게 물었다.
"나, 이 기회 잡을까?'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다른 생각 말고, 당신이 진짜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은 마치 긴 여행 끝에 건네는 따뜻한 물 한 모금 같았다.
묵직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딸에게도 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할 거 같아?"
잠시 고민하던 딸은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른 생각 말고.
나도, 아빠도 엄마 결정하는 대로 서포트할게."
그 말에 가슴 한편이 환하게 열렸다.
마치 긴 겨울 끝에 처음 피어나는 봄 햇살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제안서를 다시 펼쳤다.
책상 위에 종이를 올리고 펜을 들었다.
이름을 적는 순간, 그 서명은 새 페이지의 첫 줄 같았다.
사인한 오퍼레터를 이메일에 첨부하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그 작은 클릭이 내 인생의 한 장을 넘겼다.
물음표였던 마음이, 마침내 느낌표로 찍히는 순간이었다.
문득, 마치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가
기숙사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근거리지만 조금은 낯선 설렘,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내 안의 새로운 리듬을 찾아 나서는 느낌이었다.
아직은 막연했지만, 가방을 싸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살짝 뛰었다.
결정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그날 밤은 거기까지.
나머지는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원두를 가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삶은 때로 뜨거운 물이 닿아야 제 향을 내는 커피 같다고.
변화가 스며들어야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게 아닐까.
"오늘 커피 뭐로 마실래? 아메리카노? 라떼?"
"아니, 이번엔 에스프레소 샷 도전해 볼까?"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 웃음 사이로 커피 향이 은은히 퍼졌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한 모금씩 익어가고 있다.
주말부부의 매뉴얼은 따로 없다.
낯선 도시의 아침, 새로운 커피 한 잔,
그리고 주말마다 분주한 주방,
그 이야기들은, 아마 다음 페이지에서 이어질 것이다.
익숙한 삶을 잠시 접어 가방 속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