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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고지능 ADHD래요

미루기의 미학

by Susie 방글이




"와, 내가 유튜브에서 뭘 봤는데, 진짜 딱 나인 거 같아!"


남편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는 리모컨을 들고 TV로 유튜브 영상을 띄웠다.


"이거 같이 보자, 완전 내 얘기야!"


"이번엔 또 무슨 자기 발견이야?"


나는 살짝 눈을 흘기며 옆에 앉았다.


화면 속 정신과 의사가 차분히 설명했다.


"고지능 ADHD는 좋아하는 일이나 전문 분야엔 철저하죠.
하지만 관심 없는 일은 자꾸 미루고, 덤벙대는 것처럼 보여요.
기억력 문제가 아니라, 뇌가 흥미에 반응하는 방식이 달라요."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는 흔히 '주의력 부족'으로 오해받지만, 사실은 주의력 과선택에 가깝다. 뇌가 "재미있다"라고 판단한 일에는 시야가 좁아질 만큼 몰입하고, 그 외의 일에는 도무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특히 고지능 ADHD를 가진 사람들은 지적 호기심이 강해, 자신의 전문 분야나 관심사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일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 마치 정원의 물뿌리개가 특정 꽃에만 물을 뿌리듯, 에너지를 선택적으로 쏟는다.


남편은 화면을 뚫어져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봐봐, 내가 게으른 게 아니라 도파민 타이밍이 늦은 거라니까!"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수많은 물음표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왜 그는 늘 '내일 하지'를 입에 달고 사는 걸까?

-왜 꼭 해야 할 일은 연기하고, 흥미로운 건 밤새 붙잡고 있을까?

-왜 자꾸 잊어버릴까?


그리고, 대체 왜 이렇게 잘하면서 미뤄서 내 속을 뒤집어놓을까?


영상을 보며 그 의문들이 하나씩 풀렸다.

'아, 이게 다 뇌의 리듬이었구나.'

그제야 마음 한편이 느긋해졌다.


그는 게으른 게 아니라, 자기 뇌의 독특한 멜로디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박자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는 빠르게, 누구는 느리게, 각자의 속도로 세상을 살아간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오늘은 낙엽 꼭 치운다!" 던 남편이

두 시간째 컴퓨터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낙엽은?"

"지금 잠깐 공부 중이야. 이따 할게."


그의 공부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낙엽을 치우기 전에, 낙엽의 생태부터 탐구하는 사람처럼.

내 눈엔 한가한 놀이라 보이지만, 그에겐 집중을 위한 준비운동이다.


풍경은 영화, 뒷정리는 노동이다.
낙엽이 쌓이니 운치도 쌓이고, 일도 쌓인다.


ADHD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 때문에, 뇌는 즉각적인 보상을 주지 않는 일에 쉽게 흥미를 잃는다.


마치 시동 걸리기 전에 여러 번 키를 돌려야 하는 낡은 자동차 엔진 같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가 미루고 미뤄 결국 일을 시작하면 기가 막히게 잘한다는 점이다.


지난번엔 동생네 집에 갈 때 선물로 줄 화분 받침대를 만들어 준다고 약속했었다.


며칠, 아니 몇 주를 미루더니, 동생네 집에 가기 전날 밤이 되어서야 슬슬 시작했다.
뚝딱뚝딱, 몇 시간 만에 완성해 버렸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렇게 잘 만들 수 있으면서 왜 미뤄서 내 속을 썩이는 거야?'


그런데 완성된 받침대를 보니, 정말 기가 막히게 예쁘고 튼튼했다.
완성된 걸 보고 흐뭇해하는 내 모습을 본 남편이 씩 웃으며 말했다.

"결국 때가 되면 다 잘하는 거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뇌는 마감의 긴박함을 연료 삼아 폭발적인 창의력을 뿜어내는 모양이다.


기한은 늘 어제지만, 결과물은 늘 완벽하다.


영상 속 의사의 말이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자신의 리듬을 이해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길입니다."


나는 늘 그의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아니, 왜 저럴까?'


그의 느린 템포와 흩날리는 우선순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의 뇌는 세상과 다른 속도로 춤추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릿속을 상상한다.

바람 부는 마당 같달까.

아이디어와 할 일들이 낙엽처럼 흩날리고,

그중 몇 장은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가 버린다.


그래도 그는 언젠가, 천천히 그 낙엽을 주워 담는다.

그리고 그 낙엽을 주울 때면, 놀라울 정도로 정성스럽다.

그게 그의 리듬이다.


이제 나는 물음표 대신 미소를 짓는다.

'아하, 이 사람은 세상과 다른 박자에 맞춰 춤추는구나.'


그 영상을 함께 보며, 나는 그의 속도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걸, 그의 느린 낙엽 줍기를 보며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미루다 결국 해낼 때의 기가 막힌 결과에 감탄하며,

또 한 번 내 속을 뒤집어놓는 그의 재능에 웃음 짓는다.


그렇게 오늘도,

한 장의 낙엽이 그의 손에 천천히 닿는다.

느림의 끝에서, 나는 또 하나의 느낌표를 배운다.


그리고,


딸은 아빠를 많이 닮았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 앞에서 괜히 딴짓하는 유전자는 거의 그대로다.

그래도 내 쪽 DNA도 조금은 작동하는지,

그 애는 '내일 할게'대신 '오늘 밤에 할게' 정도로 타협한다.

우리 집은 늘 벼락치기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돌아간다.


다행 아닌가?


우리 집 유전자는 직선보다 곡선을 좋아한다. 비틀 거리며도, 끝내 함께 도착한다- 아빠와 딸


걷는 속도도, 발맞춤도 다르지만 결국 가족이다.

비틀거리다 보면, 결국 같은 풍경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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