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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녹는다

시간이 우리를 다르게 기억하게 할 때

by Susie 방글이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브런치 작가 한이람 님의 연재 '거실에 호크니를 걸면'에서 한 편의 미술 에세이를 읽었다. 미술치료와 심리학, 그리고 감정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글을 쓰신다.


그 글은 늘 조용히 다가오지만, 읽고 나면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림을 단순히 해석하거나 분석하는 게 아니라,캔버스에 스며든 시간을 손끝으로 살살 더듬듯 표현해 낸다.


그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림이 더 이상 벽에 걸린 이미지가 아니다. 내 마음 한쪽에서 조용히 숨 쉬는 감 정처럼 느껴진다. 아직 한이람 작가님의 글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그 미술 이야기를 한 번 천천히 음미해 보시길 권한다. 미술 이야기도 이렇게 재밌을 수 있구나— 읽다 보면, 아마 그런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이 있으신가요?’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을 떠올릴 것이다.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림 속 녹아내린 시계들을 볼 때마다시간이란 게 꼭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미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그림에 대해 잘 아는 편도 아니다. 그런데도 달리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그 속에 담긴 감정이 내 마음을 건드리는 순간이 있다. 마치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 느닷없이 떠올라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한낮의 태양 아래, 황량한 사막 풍경 속에서 시계들이 녹아내리는 장면. 본래 딱딱하고 정확해야 할 금속이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럽게 늘어지고 구부러지며, 시간의 본질을 잃은 채 물처럼 흘러내린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시간‘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딱 정해진 게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낀다.

시간은 시계 속 정확한 숫자보다,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즐거운 순간은 어느새 지나가 버리고, 후회나 그리움 속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 느껴진다.


달리의 그림 속, 녹아내린 시계들을 보면 그건 어쩌면 우리 마음속 시간을 보여주는 은유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이 어떻게 녹아내리고 다시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그림 한 장에 담아낸 것처럼 느껴진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녹아내린 시간과 눈이 마주친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현듯 몇 달 전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편과 함께한 평범한 주말 점심시간이었다. 순두부의 고소한 향기가 식당 전체를 감싸고, 철그릇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리듬처럼 울려 퍼지던 그날.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고, 나는 젓가락을 쥔 채로 순간 얼어붙었다.


"저 사람… 혹시 예전에 알던 그 사람 아니야?"


그분은 우리가 25년 전에 함께 알던 사람이었다.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긴 세월이 단숨에 접히며 눈앞으로 밀려드는 느낌. 순간, 시간의 방향이 앞이 아니라 뒤로 흐르는 듯했다.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봤지만, 남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분이야? 이상하네. 내가 기억하던 얼굴이 아닌데."


그의 말투에는 확신과 혼란이 뒤섞여, 마치 안개 낀 거리를 헤매는 듯했다.


"그 사람 맞아."


내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머리를 저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내가 기억하던 사람은… 좀 더 날카로웠고, 눈빛이 달랐거든."


그 순간, 내 안에서 어떤 물음표 하나가 피어났다. 그렇다면 남편이 기억하던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였을까?


우리가 둘 다 '같은 사람'을 안다고 믿던 그 얼굴이, 사실 남편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변형되어 전혀 다른 인물로 재탄생한 것은 아닐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감정의 먼지가 쌓이고, 경험의 빛이 굴절되면서, 그 '기억된 자'는 원형을 잃어버린 채 새로운 형상을 띠게 된 것이다.


아마 우리는 영영 모를 것이다. 그가 현실의 사람인지, 기억이 만들어낸 또 다른 모습인지.


식당 안은 잠시 조용했다. 그릇에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남편 얼굴을 비췄다. 남편은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이 보고 나는 묘하게 안쓰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때 우리는 결국 그분께 다가가 인사했다.


"진짜 오랜만이에요.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그의 얼굴에는 낯섦과 익숙함이 동시에 스며 있었다. 순간,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풍경이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림 속 시계처럼, 우리의 기억도 제 모습을 잃고 천천히,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 기억이란 원래 그런 걸지도 모른다.

딱딱하게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조금씩 모양을 바꾸며 변해가는 것.


Rene Magritte (르네 마그리트) The False Mirror(거짓된 거울)” 그림 속 눈이 나를 본다면, 그건 누가 누구를 기억하는 걸까?


기억의 왜곡은 우리 삶의 일상적인 동반자다.작년 겨울에 딸과 함께 한국에 갔을 때도 그랬다.오랜만에 딸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와 초등학교를 다시 찾아갔는데,딸은 운동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와, 여기가 이렇게 작았다고?"


그 말에 나도 웃음이 났다. 그때는 세상이 커 보였고, 매일이 모험처럼 느껴졌는데,이제는 기억 속 풍경이 현실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달라진 건 우리의 시선이었다.시간은 내 안의 공간과 비율을 재배치하며 과거를 재구성한다.


옛 친구 얼굴을 떠올릴 때도 비슷하다. 그 시절의 선명했던 모습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지고, 실제보다 더 아름답거나 더 아픈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 왜곡은 때로는 상처를 지키는 방패가 되고, 때로는 진실을 가리는 벽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남편의 기억도, 딸의 초등학교 풍경도, 결국 '마음의 렌즈'를 통해 필터링된 또 다른 버전의 현실이다. 감정의 물감이 스며들고, 경험의 빛이 반사되면서 우리는 각자 조금씩 다른 과거를 창조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은 왜곡되지만, 동시에 풍부해진다.잃어버린 세부는 상상으로 채워지고, 아픈 모서리는 부드럽게 다듬어진다.그것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때론 새로운 깨달음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와, 여기가 이렇게 작았다고?" - 운동장은 그대로인데, 세상을 보는 딸의 눈이 달라졌다.

그날의 식당 풍경은 이제 내게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녹아내리는 시계처럼, 기억은 흘러가고 변형되며 우리의 삶을 재정의한다.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물음표를 던지고,느낌표를 터뜨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인생은 결국 그 두 사이를 오가는 끝없는 파동 같다 —확신 없는 질문과 순간의 깨달음이 엮여 흐르는, 우리만의 시간의 강.


기억이 녹아내릴지라도,그 안에 담긴 온도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온도가 바로 우리가 살아온 증거이자,

서로의 마음에 남아 있는 미세한 흔적이니까.


Jean-Michel Basquiat (장 미셸 바스키아) - Untitled (Skull)


달리가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기억을 그려냈다면, 바스키아는 삶과 죽음, 혼란과 정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그림은 결국 우리 각자에게 남겨진 시간과 삶, 그리고 마음속 질문의 흔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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