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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어봐

멈추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by Susie 방글이




남편이 자주 하는 말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엔 꼭 나에게 말했다.


"가만있어봐."


말은 멈춤인데, 그 말이 나올 땐 늘 움직임이 있었다.

마치 출발선에서 잠시 고삐를 당긴 말처럼,

잠깐 멈춘 듯 보였지만 사실은 이미 달리기 시작한 신호였다.


유타행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 직전,

집 안의 가구를 뒤바꾸기 전,

남편의 "가만있어봐"는

망설임이 아니라 결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린 여행도 즉흥적이다.

오늘 결정해 내일 떠난다.

결정하는 순간 불이 붙고,

그다음은 불꽃놀이처럼 곧장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새로운 곳을 향한 발걸음은 늘 가볍고 단호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집을 꾸미며 새로운 터전을 상상할 때,

우린 늘 다음 행선지를 마음에 그렸다.

어디든지 가보자!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한국에서 살던 시절, 딸이 중학교 1학년이던 여름방학.

남편과 딸, 그리고 나, 우리는 셋이서 미국 서부 여행을 떠났다.


남편에게 이 여행은 특별했다.

한때 유학 시절을 보냈던 곳이자, 우리가 결혼 후 신혼살림을 꾸렸던 곳.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간 지 15년 만에 다시 찾은 미국 땅이었으니까.

그는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 속에서, 젊은 날의 자신과 그 시절의 우리를 함께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모녀는 해마다 한 두 번씩 미국을 오가곤 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달랐다.

세 식구가 함께 걸으며 오래도록 기억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여정이었다.


우린 차를 타고 그랜드 캐니언을 지나,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달렸다.

사막은 모래빛 바다 같았다.

어디서부터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땅인지,

경계는 증발해 버린 듯 사라지고

우리는 작은 등불 같은 차에 몸을 싣고 항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사막을 덮기 시작했다.

사막의 어둠은 단순한 밤이 아니었다.

세상이 먹물에 잠긴 듯한, 절대적인 검은 캔버스였다.

오직 차의 전조등만이 그 위에 작은 흰 붓질을 하듯,

앞으로 가는 길을 한 뼘씩 밝혀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아주 작게, 점처럼 보이던 불빛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가 낮은 언덕을 넘자, 커튼이 활짝 걷히듯 어둠이 갈라지고

화려한 불빛이 쏟아졌다.


수천 개의 별이 땅으로 내려와 춤추는 듯,

사막 위의 도시는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라스베이거스였다.

눈부시고, 현란하고, 숨이 멎을 만큼 찬란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작은 별가루가 된 기분이었다.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불빛을 바라봤다.


그 순간,

우리는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자."


그건 단순한 여행자의 감탄이 아니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자기 땅을 다시 찾아낸 듯한 확신이었다.


남편과 나는 딸에게 물었다.

"너, 미국에서 사는 거 어때?"


딸은 14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잠시의 주저도 없었다.

마치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을 끝낸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구래!"


그 순간,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여행자의 설렘은 사라지고, 돌아갈 길이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우린 그 자리에서 이미 마음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뒤,

우린 곧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여행하다가 갑자기 결정하고,

그 길을 따라 살아온 것.

우린 늘 그랬다.

가슴이 두근대며 새로운 모험을 향해 날아오르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이야기는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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