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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나를 위한 첫 방학

쉼표를 찍다

by Susie 방글이




28년.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 속에서 나는 늘 뒷전이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영어 숙제를 검사하고, 발음을 교정하며 학원과 과외를 오갔다. 미국에서는 회사 인사 담당자로서, 사람을 챙기고 서류를 챙기고. 집에 돌아오면 강아지 밥과 산책, 화초 물 주기, 마당 잡초 뽑기, 잔디 관리까지.

딸아이 걱정은 덤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라는 존재는 늘 맨 마지막 순서였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나를 위한 시간이 왔다.

회사? 그만뒀다.

알람 없는 아침, 스케줄 없는 하루.

'어, 오늘 뭐 하지?'라는 낯선 자유로움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이제 진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다행히 내 곁에는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다.

가까운 곳에 사시는 부모님은 남동생 둘이 든든하게 챙겨줘서 마음 한구석이 한결 가볍다. 늘 내가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던 화초들, 그 녀석들까지 동생이 보살펴준다고 한다. 이렇게 믿음직한 지원군이 곁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진작 이 방학을 시작했을지도.


딸은 다른 주에서 스타트업 회사 생활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같은 미국 하늘 아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물론, 크고 작은 걱정이 없진 않지만, 이젠 나도 딸도 서로 버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 이 녀석이 또 문제였다.

"엄마, 내가 데리고 있을게."

딸의 이 한마디에 모든 게 해결됐다.

작은 손을 잡고 유치원에 데려가던 그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문득 그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물론 강아지는 뭔 죄인지 모르겠지만, 잠시 딸과 함께 지내야겠지.)


이 글을 쓰는 지금, 18시간 뒤면 나는 비행기를 탄다.

목적지는 한국.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여행이다.

일정표도, 꼭 가야 할 장소도 없다.

그저 먹고, 자고, 걷고, 책 읽고, 글 쓰고, 멍 때리고, 또 먹으며 시간을 흘려보낼 생각이다.




작년 겨울, 회사에서 2주 휴가를 내고 12년 만에 다시 밟은 한국 땅.

우연히 연락이 닿은 옛 제자를 만난 날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함께했던 그 아이는 어느새 군대까지 다녀온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밥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 속에서, 그 아이의 여전한 미소 속에 어른스러워진 목소리가 문득 시간이 흐른 무게가 느껴졌다.

"쌤, 꼭 다시 봐요!"

그때는 그냥 웃으며 "그래, 또 보자"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것도 완전한 방학 모드로 돌아올 줄은 나도 몰랐다.


13년 전, 영어 교사로 바쁘게 뛰어다니던 한국에서의 시간. 짧은 휴가로 찾은 한국 땅, 그때는 골목 냄새도, 길거리 떡볶이의 매콤한 향도, 시장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그때 놓쳤던 풍경과 맛, 그리고 나 자신을 천천히 음미하려 한다.


나를 위한 3개월

28년 만의 방학.

조금 늦었지만, 괜찮다.

이제라도 나를 위해 시간을 쓰기로 했으니까.

이 3개월은 나를 조금 더 좋아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한국의 거리에서, 낯익은 골목과 새로운 풍경 속에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마주하며 조금씩 마음을 달래 볼 생각이다.

방학이 끝난 뒤 뭘 또 할지는 나중에 생각할 거다.

방학 숙제를 미루는 것처럼, 그 생각과 계획도 천천히 미뤄둔다.


3개월 뒤 일상으로 돌아갈 그날,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 더 나다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수고했어, 나.


이제 진짜 방학이다!


이 여정은 나를 찾아가는 첫 페이지가 될 것이다.


키워드: #방학 #자유 #여행 #나를 찾아서 #한국 #자기 성찰


괜찮아! 난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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