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흔적
새벽 4시, 한국의 고요한 아침 공기가 서늘하게 감돈다. 창밖은 아직 어둠이 짙고, 손에 쥔 커피 잔에서 김이 은은히 피어오른다. 그 정적을 깨듯 미국에 있는 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엄마, 보험회사에서 연락 왔어. 차를 폐차해야 한대."
짧은 문장에 가슴이 순간 철렁했지만, 곧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이번엔 망설여졌다. 아마 이 일쯤은 딸이 스스로 정리해 볼 때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딸은 3년 전 타주로 이사하며 독립을 시작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독립은 늘 어딘가 어설펐다.
솔직하게 말해, 어설프게 보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아직도 내가 손쓸 자리가 남아있을 것 같아서. 머리로는 이미 성인이라지만, 내 마음속에선 여전히 어린애였으니까.
딸의 연락 한 통에 마음이 들썩였고, 나는 늘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오래된 차가 사고로 망가졌을 때도, 남편과 나는 14시간을 운전해 새 차를 가져다주었고, 보험도 내 이름으로 가입했다. 딸이 어른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 지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세 달 뒤, 미국 중서부를 강타한 토네이도가 딸의 차를 덮쳤다. 강풍에 쓰러진 나무가 유리창을 깨뜨리고 차를 망가뜨렸다는 소식을 듣자,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딸은 의외로 담담했다. 보험회사와 통화하고, 폐차 절차를 알아보고, 다음에 사야 할 차를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곁에 있었다면, 또다시 모든 걸 챙기려 했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 딸은 자기 방식으로 이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며칠 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토네이도가 와서 차에 나무가 쓰러 질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진짜 황당하지 않아?" 그리고 그것도 도시 한복판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도 덤덤하게 넘기는 딸의 목소리엔 어른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인생이란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운을 '참 어이없네' 하며 정리해 가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 듯했다.
그 황당한 순간들 속에서 딸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 역시 알게 됐다.
딸이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더는 내가 모든 걸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기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이 들었지만, 딸의 어른 됨을 지켜보며 나 또한 놓아주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딸이 예상치 못한 큰 용돈을 보내왔다. 한국에서 잘 쓰라며 건네는 그 모습에, 이제는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되어가는 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스스로 세상과 부딪히며 부모까지 챙기는 딸의 마음이 고마워, 우리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또, 딸의 어깨 위에 올려진 무게가 있다. 12년 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강아지다.
"엄마 아빠 한국 가 있는 동안 강아지는 내가 데리고 있을거야"라고 딸이 회사 사장한테 말했다.
그말을 들은 사장은 웃으면서 "You’re becoming a real adult." ("이제 진짜 어른이 되는 거아.") 라고 했다.
그땐 농담처럼 들렸지만, 이제 그 말이 실감 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강아지에게 밥을 챙겨주고, 최소한 하루 3번 함께 공원을 산책해야 하며, 때론 예상치 못한 병원 방문에도 묵묵히 대처해야 하는 딸. 작은 생명 하나를 책임진다는 건 단순한 돌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일상 속에서 딸은 책임감과 배려를 배워가고 있다.
전에 들은 한국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생 딸의 성적 문제로 교수를 찾아갔다는 어느 부모의 사연. 그때는 좀 지나치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딸의 작은 일에도 서둘러 전화를 들고, 문제를 해결해주려 했던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결국 부모 마음이란 비슷한 법이다.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아야겠다. 딸이 어른이 되어가는 만큼, 나 역시 '엄마'라는 이름 아래 꼭 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 둘 내려놓으며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자식을 위해 살아왔던 시간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고, 어쩌면 늦게 찾아온 나의 독립을 배우는 것. 어쩌면 이 뜬금없는 토네이도 같은 인생 한복판에서, 그 황당함 속에서, 우리 모두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거 아닐까.
이 글을, 자식을 키우며 또 다른 자신을 찾아가는 모든 부모님께 조용히 건넨다.
어느새, 딸의 그림자가 나란히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