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 주의보
아끼다 똥 된다,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우리 집 진열장 한쪽에는 남편이 출장 때마다 사온 미니 양주들이 쫙 늘어서 있다.
스카치위스키, 버번위스키, 이태리 리커, 코냑 등등.
병마다 여행 추억이 담겨 있어 마시기 아까웠다. '특별한 날에 딱!’'하며 모으다 보니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사실 완벽한 순간만 기다린 내 탓도 좀 있다.
그러다 대청소 중 진열장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플라스틱 병에 든 술들은 반 이상 증발! 어떤 건 반만 찰랑이고, 어떤 건 바싹 말라붙었다. 남편도 나도 안 마셨는데, 뭐야 이게? 알고 보니 플라스틱 병이 술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유리병은 멀쩡하던데. 그 순간 딱 떠오른 속담.
"아끼다 똥 된다."진짜 명언이다.
술 말고도 낭패 본 게 많다. 한국에 왔으니 동남아 여행이나 갈까 싶어 티켓을 알아보다가, 예전부터 '나중에 퍼스트 클래스로!' 하고 차곡차곡 모아둔 마일리지가 일부 소멸된 걸 알았다. 덕분에 이코노미도 못 타게 됐다. 비싼 화장품도 다르지 않았다. '아껴 써야지' 하다가 유통기한 지나서, 결국 발뒤꿈치에 바디로션처럼 발랐던 기억도 있다.
가족과의 시간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 작년 엄마 생신 때, 멋진 레스토랑에 모시려다 바빠서 집밥으로 때웠다. 부모님은 늘 "괜찮아"하신다. 그때 집밥 먹자고 하셨을 때 우겨서라도 모시고 갈걸, 지금은 후회된다. 요즘 엄마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밖에 잘 못 나가신다. 그날 좀 더 신경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근데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지인 얘기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던 분인데, 좋은 친구가 생겼다. 같이 영화 보고, 밥 먹고, 밤늦게 톡 하며 점점 가까워졌다. 주위에서도 찰떡궁합이라 했지만, 고백은 망설였다.
"너무 급하면 어색할까 봐, 타이밍 기다려야지." 근데? 그분, 다른 사람과 잘 됐단다. 지인은 며칠 멍하더니 내게 푸념했다. "고백할 타이밍 몇 번이나 있었는데… 내가 너무 신중했나 봐."
그때 떠오른 말. '고백도 아끼면 똥 된다!'
진열장 앞에서 깨달았다. 인생은 플라스틱 병과 유리병으로 나뉜다.
유리병처럼 소중히 간직할 건 상황에 따라 아껴도 되지만, 플라스틱 병처럼 새는 건 과감히 꺼내 써야 한다. 술, 마일리지, 화장품, 고백, 가족과의 시간까지. 너무 아끼다 보면 기회는 날아가고, 술은 증발하고, 썸은 연애로 못 넘어가고, 에센스는 발뒤꿈치로 간다.
그러니까, 진열장에 미니 양주 있으면 오늘 당장 꺼내 친구랑 한잔 하시길 바란다. 마일리지는 여름휴가로
바꾸고, 고백할 마음은 지금 톡 날리고.
인생은 기다림이라지만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허무하게 날리기엔 너무 아깝다.
진짜 아껴야 할 건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