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의 재해석
버려졌다고 생각했어. 이 곳에서 나는 완벽한 타인이자 이방인이었으니까. ‘빨간 머리’에 홍조를 띤 얼굴. 조금은 다르게 생긴 반쪽짜리 외국인에 대해 모두들 완강히 거부했지. 생전 본 적도 없는 아버지라는 사람 때문에 내가 갖게 된 외모는 나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어. 어렸을 때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고 홍당무라고 놀렸고 어른들은 양공주의 튀기라고 수군거렸지. 양공주의 뜻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지나고 나서였어. 기억은 차곡차곡 부지런히도 쌓이며 내속에 견고한 컴플렉스를 만들어 냈던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줄 아는 외국어는 한마디도 없었다는 게 참 웃겨. 완벽한 한국인으로 자랐지만 완벽한 타인이었던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지.
“다 죽여버릴 테니까. 안나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던 아저씨의 폭력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던 때였어. 나 또한 예외 없이 그 폭력의 대상이었지. 당시만 해도 10대였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뿐이었어. 내 손에 이어폰이 들려있다면 다행이었지. 볼륨을 최대한 높여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리고 나면 그래도 화가 풀렸으니까.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야속하리만큼 예뻤어. 가방에 노트가 있는 날은 그림을 그렸어. 글도 썼고. 신기하게도 뭐라도 하고 있으면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 참 좋아. 특히나 소설을 쓸 때면 더. 소설 속에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우와 이거 진짜 니가 쓴 거야?”
언젠가 내 소설의 첫 부분을 ‘너’ 한테 보여줬을 때 돌아온 반응이었어. 진짜일까? 기대도 안 했던 너의 반응은 반전 그 자체였던 것 같아. 너무 재미있다는 말을 하며 너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긴 수사를 써가며 말했어. 무엇보다도 너무나 위로가 된다며 말이야. 이게 다 ‘소설 속 빨간 머리’ 덕분인 것 같아. ‘소설 속 빨간 머리’는 현실 세상의 빨간 머리인 나와 너무도 달랐으니까. 그녀는 어딜 가나 당당했고 빨간 머리와 조금 다른 외모를 자랑스러워했지. 위트도 있었던 것 같아. 뭔가 곤경에 쳐하면 외국인인척 하면서 어깨를 으쓱하며 얼렁뚱땅 넘어가곤 했으니까. 물론 낄낄거리며 본인의 기지를 뿌듯해하는 것도 잊지 않았어. 아마 나였다면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이 더 빨개졌을 거야.
“근데 말이야. 이 부분이 좀 이해가 안가.”
어느 날 내 소설을 보고 칭찬만 하던 ‘네’가 한 말이었어. 좀 말이 안 되지 않냐며 말이야. ‘소설 속 빨간 머리’가 아무리 밝은 아이라고 해도 알바를 잘렸는데 그렇게 밝을 수 있냐고 말이야. 그녀에겐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네 말이 무리도 아니었을 거야. 아마 현실 속에서 나였다면, 아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렸을지도 몰라. 그래. 나는 네 말을 듣고 몇 번이나 곱씹으면서 그 부분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어. 그렇게 ‘소설 속의 빨간 머리’를 울려보기도 하고, 당차게 소리 지르며 반항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지. 그런데 어느 것 하나 딱 맞게 붙는 것 같지 않더라.
“소설 속 빨간 머리야! 어떻게 된 거니? 뭐라고 말 좀 해봐.”
소설을 쓰면 쓸수록 알게 됐던 것 같아. 작가가 ‘신’이 될 수 없다는 걸 말이야. 소설이 아무리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라 할 지라도 캐릭터들은 각자의 삶을 살게 되는 거니까. 순정파 캐릭터가 갑자기 속물로 변한다면 적어도 그에 맞는 동기가 있어야 되는 것처럼 캐릭터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정당성이 있어야 했어.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만들어 놓은 캐릭터들에게 묻곤 했지. 저 위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아.
“정신 차려! 빨간 머리!”
꿈속에서 ‘소설 속 빨간 머리’는 나를 흔들어 깨웠어. 그렇게 그녀와 얼마 동안 이야기를 나눴나 몰라. 그녀는 알바 잘릴 건 슬픈 일이지만 자기는 울지 않겠다고 했어. 오늘 슬픈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내일은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니까 두근거린다는 거야. 아 진짜 이 긍정여왕 어쩌냐. 사실 황당했어. 욕도 좀 했던 것 같아. 슬퍼하지는 않더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멍청한 X아!’ 뭐 이런 거였던 것 같아. ‘소설 속 빨간 머리’는 그런 나를 보면서 오히려 낄낄 거리더라. 재밌어하며 말이야.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다가 언제부턴가 나도 따라서 낄낄 거렸던 것 같아. 그렇게 배꼽 잡고 웃은 게 얼마만인지 몰라.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일들은 항상 일어나. 그 슬픔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온전히 내 선택이야. 이번에는 슬퍼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었어!”
소설 속 빨간 머리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말을 하고 총총 뛰어가 버렸어. 자기는 또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려면 바쁘다나.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 주제에! 분노하면서 막 잠에서 깼던 것 같아. 다시 현실이었어. 칙칙한 내방. 형광등도 어둑어둑 한데 자꾸 현실만 보면 마음이 더 어두워지는 것 같더라. 그래도 주변을 둘러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온 건 그녀 때문이었어. ‘소설 속 빨간 머리’말이야. 그녀는 볼품없는 내 방에 와서도 어쩐지 잘 놀 것 같은 거야. 이 가방은 진짜 예쁘다며 빌려달라고 하고, 이 책은 진짜 재미있을 것 같다고 자기가 만저 읽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아마 오늘 밤은 여기서 자야겠다고 했을지 몰라. 궁금하게 너무 많다고 말이야.
손바닥만 한 창문 틈으로 보이는 서울은 여전히 예쁘더라.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이 도시에서 오늘도 슬픈 일들을 부지런히 일어나겠지. 그리고 저 불빛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오늘 하루를 또 마무리할 테고 말이야. 물론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자신의 몫일테고. 소설 속 그녀와 ‘네’가 있는 나의 밤은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오늘 밤은 너에게 전화를 걸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떨면서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야. 조심스럽게 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눌렀어. 그리고 내가 인사했지.
“여보세요~ 나야 앤! 뭐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