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은 단백질〉리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렇다. 돈 없고 사회적 지위도 불안정한 세 명의 인간 친구들, 치킨집을 운영하는 닭과 족발집을 운영하는 돼지, 배가 고파 구걸하는 살아있는 돼지 저금통. 그리고 치킨이 된 치킨집 사장의 아들 닭돌이.
이 무슨 기괴한 조합이냐고? 영화에서 본 것만을 썼을 뿐이다. 애초에 공장식 축산업도 동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디스토피아적 세계일 텐데 뭐. 그리고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은 본 경험이 있다. 돼지가 돼지고기를 들고 있는 삼겹살 전문점의 간판이라던가, 닭이 닭다리를 들고 있는 치킨집의 전단지 같은 것들을.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그로테스크하다고 느낀다면, 그동안 봐왔던 그런 간판이나 전단지 속 돼지와 닭에게 가족이나 감정, 생명력이라는 것이 없다고 암묵적으로 규정했던 우리의 그로테스크한 정서 아니겠는가.
〈부산행〉으로 친숙한 연상호 감독의 초기 작품 〈사랑은 단백질〉은 〈송곳〉과 〈지옥〉으로 유명한 만화가 최규석의 신인 시절 작품을 기반으로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연상호 감독와 최규석 만화가의 조합이라니 유쾌하지 않은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고, 정말 그렇다.
줄거리부터 이야기해보자.
배가 고파 ‘살아있는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라 치킨을 시킨 인간 친구 세 명에게 ‘의수를 낀 돼지’가 배달부로 온다. “우리 족발 안 시켰는데?”라는 말에서, 살아있는 돼지를 이미 ‘고기’로 인식하고 있는 현대 인간의 비정한 정서가 느껴진다. 그 뒤로 치킨집 사장이 울면서 뒤따라 들어오는데, 사연인즉슨 지금 배달한 치킨이 닭 사장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돼지 사장은 ‘그동안 다른 닭들은 잘 튀겨 팔지 않았느냐, 손님 앞에서 뭐 하는 것이냐’며 소리친다. 이 대목에서 돼지 사장이 의수를 한 이유가 족발을 팔기 위해 자신의 손을 잘랐음을 알 수 있다. 돼지의 대사가 얼마나 자조적인지 곱씹게 된다.
인간 세 명은 치킨이 된 닭돌이의 사정을 듣고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인다.
맛있겠다(A)
불쌍하지만 맛있겠다(B)
먹지 못하겠다(C)
A는 앞서 돼지를 보고 ‘족발 안 시켰는데?’라는 말을 한 친구이다. 어쨌든 두 친구(A와 B)에게 닭돌이는 먹힌다. C는 본인들이 치킨을 주문함으로 인해 닭돌이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느끼곤 거리를 배회한다. 치킨을 먹으면서도 무언가의 부채의식이 남아있던 B는 다음날 닭돌이의 뼈를 갈아 닭 사장에게 찾아가 소박한 장례를 치룬다.
이 씁쓸한 이야기는 삶에 있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타자의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곱씹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오늘 저녁은 치킨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사람에게라면 영화의 제목은 ‘단백질은 사랑’이 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잡식주의자에게 ‘단백질이 땡기는 본능’이 죄악은 아니지 않겠는가. 어쨌든 인간은 먹어야 하고, 나의 배부름을 위해 무언가(동물, 식물을 떠나)는 희생되어야 하므로.
영화는 삶에 대한 업보를 말한다. 자식을 팔아야 하는 기구하고 처절한 삶의 비극을 철저한 희극으로 덮어씌운 이유도, 그것이 ‘인간 식사’의 형상임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먹고 사는 것은 업보를 쌓는 과정이고,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처럼 쌓은 업보를 생각하는 것까지가 식사의 과정이라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인간 친구 세 명 중, A와 C의 간극보다 A와 B의 간극이 더 크다고 느꼈다. 적어도 B는 상위 포식자로서 배부름을 충족하면서도, 본인의 포식을 위해 희생된 단백질의 존재를 잊지 않고 경의를 표하는 인물이다. A에게 그냥 단백질이 사랑이었다면, B에게서 비로소 영화의 제목인 ‘사랑은 단백질’이 구현된 것이다.
자본주의건 그 이전의 사회 시스템에서건 인간은 늘 희생을 담보로 배를 불렸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자연의 섭리와 그 속에서 이어지는 관계, 우리의 인식을 단절시켰다는 점이다. 먹거리와 내 식탁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우리는 고기 이전의 생(生)을 판타지의 영역에 가두었다. 가축의 존재가 판타지가 되었기 때문에 닭다리를 들고 있는 치킨집 전단지는 유희가 될 수 있었다. 현대사회의 분절된 관계는 B나 C와 같은 인물을 유난스러운 성격으로 치부한다. 실상은 이런 존재들에 의해 생명력과 존재의 흔적이 기억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둔화된 감각과 기계적 소비는 비단 고기와 인간 사이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것을 판타지에 가둠으로써 사람의 정서 자체는 쉽게 비정해진다.
이를테면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의 존재를 현실에는 없다고 치부하면, 쓰레기를 버리는 것에 책임이나 부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어진다. 문밖의 배달 종사자를 상상 속에 가두면, 배달 종사자를 비하하는 ‘딸배’라는 표현을 입에 담는 것에 부끄럼을 느끼지 못한다.
추측컨대 영화에서 치킨을 시켜 먹는 인간 친구 세 명은 사회적으로 입지가 약한 존재다. 돼지와 닭의 입장에서 상위 포식자로 그려지지만(돼지 저금통에게는 잔인한 약탈자쯤 되려나), 동물과 인간의 탈을 지우고 본다면 영세한 자영업자와 가난한 취업준비생일 뿐이다.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이 빈약한 지위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착취의 대상이나 존중받지 못할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비정한 초상이다.
자연의 섭리에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먹고 먹힘의 관계가 필연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 모습이 비정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할까. 먹거리와 이를 둘러싼 모든 관계를 대하는 나의 모습은 A일까, B일까, C일까. 아, 그 전에 먼저 판타지부터 지워내자.
글 마은지
이 글은 지속가능한 미식 잡지〈SUSTAIN-EATS〉 4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종이잡지에서 더 많은 콘텐츠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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