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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Nov 10. 2016

통조림 꽁치와 묵은지

사물의 유통기한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기한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년으로 적어야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을 기억하는가. 거짓말처럼 만우절날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경찰 233. 그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을 스스로의 유통기한으로 정해두고서. 그렇게 5월 1일까지 유효하다고 '명시'된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삼키듯 곱씹으며 스스로 위안을 삼던 경찰 233. 4월 30일이 되자, 편의점 가판대에는 유통기한이 임박한 통조림이 더 이상은 없다. 점원과의 실랑이 끝에 폐기처분 직전인 통조림을 한가득 안고서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온 그는 헛헛한 마음에 30개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두 비운 뒤, 텅 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은 바에서 우연히 만난 묘령의 여인과의 하룻밤을 보낸다( 대화를 나누고, 지친 그녀를 호텔방에 눕혀주는 게 전부). 다음날 그는 그 여인으로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는다. 


"한 여자가 생일을 축하해 줬다. 1994년 5월 1일에. 그 말 때문에 난 이 여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기한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년으로 적어야지."


 옴니버스 구성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바로 경찰 No.633과 아미의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역시나 실연의 아픔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경찰 633에게 마음을 빼앗긴 아미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가 놓지 못하는 과거의 흔적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역시나(2) 등장하는 통조림의 미장센. 아미는 그의 집 찬장 가득 쌓인 정어리 캔을 파인애플 통조림 라벨로 바꿔치기해 놓는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시대를 앞서간 PPL이라고나 할까).


 엄연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얽히고설킨 도시의 빌딩 숲. 그리고 그 도시 속의 사람들. 유통기한은 꼭 음식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다시 지속되는 새로운 듯한 일상. 


 웬일인지 헛헛한 마음에 무슨 일이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요즘이다. 언제 사 두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꽁치 통조림 캔 하나를 찬장 속 깊숙한 곳에 한쪽 팔을 더듬어가며 간신히 꺼내 들었다. 통조림 캔에 기록된 날짜까지 이 무기력함을 정당화하기로 하며.

 


 그리고 오래 될 수록 상한가를 치기도 하는 때아닌 제철음식이 바로 묵은지. 김장철을 맞이해 김치통 확보에 비상등이 켜질 시점이다. 오래된 것을 보내며 새로운 것을 들여야 할 시점. 그리하여 이 날의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은 묵은지 꽁치찜으로 낙점. 



1년을 맞은 묵은지는 버무릴 당시의 갖은 양념이 속속 벨만큼 베어 눈이 시리도록 붉게 물들었다. 별다른 맛을 첨가하지 않아도 묵은지 하나면 부속재료로써 훌륭하다! 늦가을 즈음에 타작한 참깨로 갓 짜낸 신선한 참기름 몇 스푼이면 오래된 그 맛이 되살아 나는 듯한..



달큼한 맛을 담당해 줄 양파도 송송 썰어 넣고.



 드디어 통조림을 개봉. 고양이와 정을 돈독히 하고 있을 애묘인(혹은 애견인)이라면 공감해 줄 에피소드 하나. 캔 따는 소리에 화들짝 몰려들어 정강이를 마구 비벼대기 시작하는 작은 네 발의 맹수. 



푸르르게 빛나는 꽁치의 푸른 등을 마주하고서. 새삼스럽게 통조림 기술력에 감탄을!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설탕 약간이 전부인 양념으로 통조림 육수에 졸여내면 완성. 








매콤하고 짭조름한 찬을 중화시켜 줄 계란찜을 곁들여 한 상 차려낸다.



통조림 안에서 삭을 대로 삭은 꽁치는 그 뼈마저 부드럽다. 



 길게 찢은 묵은지에 꽁치 조각 한 덩이를 싸서, 밥 위에 얹으며 이 세계의 유통기한을 곱씹어 본다. 더불어 나 자신의 유통기한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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