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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Oct 22. 2016

가을 텃밭 한 상





 시작은 고구마였습니다, 그런데 어디 한 우물만 팔 수 있겠습니까. 몸은 고구마밭에 와 있는데 마음은 콩밭에, 아니 조각조각난 텃밭에 가 있는 것을요. 음습한 토양의 기운을 머금은 고구마가 한낯의 태양빛 아래서 습기를 털어낼 동안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텃밭을 살피러 다녀 봅니다.



 힘들이지 않고 쪽파를 한 단 정도 쓱 뽑아내고, 풍성하게 자라나진 않았지만 초록빛으로 물든 시금치도 슥삭슥삭 캐냅니다.



 대야 만한 늙은 호박이 가을의 기운을 머금고 여물어 갈 동안, 올 해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풋풋한 애호박도 서둘러 따냅니다. 아직도 호박 덩굴을 따라 노오란 꽃이 피어나네요. 꽃이 지고 결실을 맺었을는지, 다음번 콩과 목화솜 수확을 위해 방문했을 때 한 번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눈에 띄게 짧아진 해가 방심한 틈을 타 일찌감치 서산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네요. 그 사이 고구마는 물론, 찬거리가 하나둘씩 쌓여갑니다. 모기가 활개를 펴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겠습니다.



 밭을 떠나 집으로 데려온 텃밭의 보배들. 토란대는 껍질을 까고 삶거나 말리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니, 당장 밥상에 오를 수 없겠단 생각이 듭니다. 휴일의 망중한을 즐기느라 늦은 아침을 대충 때우고 한가로이 노니다 보니 살며시 배가 고파오네요. 급한 마음에 후다닥 찬거리를 치러내 식사를 해야겠습니다!  



 호박, 쪽파, 고구마, 시금치가 전부입니다! 실은 한 주 동안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었던지라 별다른 찬거리를 탐하지 않게 되었지만요.



 밥 짓는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릴 테니 우선 텃밭에서 캐 온 고구마를 하나 집어 듭니다. 막 수확한 신선한 고구마를 당장에 쪄서 열무김치라도 몇 조각 올려 먹고도 싶지만, 어디서 들은 이야기로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당도가 응축된 맛깔난 고구마로 거듭난다네요. 그렇다면, 살짝 밥에 올려 고구마밥을 지어 그 맛을 살며시 음미해 보아야겠습니다.



조각난 고구마를 햅쌀 위에 얹어 두고서.



 귀여운 호박들 사이에서 탐스럽게 영근 한 녀석을 골라 듬성듬성 썰어줍니다.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들깨가루를 넣고 버무린 찬 하나를 만들어 보려고요.



호박과 궁합이 좋다는 새우젓을 한 숟갈 떠 놓고 예열된 팬 위에 들기름도 술술 둘러줍니다.



 호박의 수분으로 팬이 자작해지며 비릿한 새우젓의 짠내가 솔솔 풍겨올 즈음 들깨가루와 물을 가감해가며 농도를 맞추어 줍니다.



 들깨 호박볶음이 완성되고, 달궈진 솥뚜껑 사이로 밥 짓는 냄새가 폴폴 풍겨오고 있네요. 서둘러 쪽파를 다듬어야겠습니다. 마침, 한옥의 지붕 위에서 뜨겁게 뜨겁게 건조된 태양초가 빛나고 있습니다. 여름의 텃밭에서 무던히도 따다가 말렸더랬죠. 곱디고운 붉은빛 사이로 매캐한 매운 내가 코끝을 자극합니다.



가을 햇사과의 은은한 단맛이 뇌리를 스쳐갑니다. 파김치의 단맛은 제철 가을사과로 돋워 보아야겠습니다. 잔뜩 약이 오른 쪽파의 알싸한 기운에 눈물을 훔쳐가며 다듬은 쪽파를 먹기 좋게 반토막 냅니다.  



고춧가루와 마늘, 액젓, 쯔유, 사과즙으로 슥삭슥삭 비벼낸 양념장이 순식간에 완성되었습니다.



다듬은 쪽파를 양념장에 슥삭슥삭 비벼주면 간단하게 가을 파김치 완성.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시금치만 남았군요! 뿌리 끝을 기준으로 가지런히 모아 밑동을 썩뚝 잘라냅니다.



이제 흐르는 물속에서 깨끗이 흙을 씻어낸 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볼까요.



 늘 오버쿡이 되어 물내가 났던 것은 물론, 쓴 맛까지 우러나와 난항을 겪어 왔던 시금치무침이 이번에는 어떨는지요. 나름의 정성을 담아 냄비 앞을 떠나지 않고 골고루 익도록 뒤적여 봅니다.  



 순전히 감으로 끓는 물에서 건져낸 시금치를 찬물에 살짝 헹구어 물기를 꼭 짜냅니다.



 국간장으로 밑간을 한 뒤 참기름과 참깨를 넣고 버무려 주면 마지막 찬까지 완성입니다.



이제 반상기를 꺼내 가을의 텃밭에서 나온 찬들을 담아볼까요.



가을 텃밭의 메인이벤트였던 고구마도 햅쌀 위에 얹혀 포슬포슬 잘 익었군요.



솥 아래 눌어붙은 누룽지는 식사를 마칠 때 즈음 구수하게 우러나겠지요.



가을 텃밭 한 상





 뜨거운 누룽지를 후루룩후루룩 소리 내어 먹으며 '시원하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한국인의 곡기 식문화가 새삼스럽게 뇌리를 스쳤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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