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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Apr 19. 2020

머랭 팬케이크

무심한 정성





 

요즘 관심사는 '무심한 정성'이다.  지금을 유지하며 단순하게 가꾸는 중. 내 곁에 안착한 주변을 정성껏 보듬는다고나 할까. 예를 들면 이런 것. 봄을 맞아 화사한 화초 꾸러미를 새로 들이기보다 겨울을 난 뿌리에서 소생의 기쁨을 만끽한다. 완독의 성취감으로 고이 봉인한 오래된 책을 펼쳐 행간 낙서와 밑줄의 흔적을 좇아 과거의 나와 조우하기도 한다. 


무심한 정성으로 냉장고 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언제나 곁에 있으므로 새로울 것 없는 식재료, 달걀. 알이 깨지기 이전 세계와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다를까.


 


달걀을 깨고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한다. 달걀의 촉감은 차갑고 끈적인다.



달걀흰자의 가장 세련된 형태는 아마도 '머랭'이 아닐까. 이 머랭으로 쿠키도 굽고, 마카롱도 만든다.



휘핑한 노른자에 머랭을 섞어 반죽을 만든다.  



부풀어 오른 머랭, 행여나 숨이 죽을까 신생아 발등 쓰다듬듯 사뿐사뿐 저어준다.



요리의 충직한 기본은 예열이 아닐까? 예열만 잘해도 품격이 올라가는 미묘한 맛의 세계.



설익은 반죽 표면에 기포가 올라오면 남은 머랭을 올린다. 이때부터 불 조절의 미학이 빛을 발한다. 약불 유지가 포인트. 반을 접어 새하얀 머랭을 어루만지듯 감싸면 완성.



달콤한 메이플 시럽을 얹은 머랭 팬케이크와 커피 한 잔. 



마시멜로우를 머금은 계란빵 정도의 표현이 적당하겠다. 무심한 정성의 결과물.



각자 삶의 단계가 있을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온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미 수없이 외부 자극을 흡수해 왔고, 평지든, 경사든, 내리막이든 각자의 호흡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산산이 조각난 알 바깥의 세계에서 깨진 석회질 조각을 맞추기 위해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싸운다. 완벽했던 알 속 세계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면 다행이다. 알이 깨지기 이전 세계는 너무도 짧은 듯하고 알에서 깨어 나온 이후의 세계는 너무도 길게만 느껴진다. 나는 알 바깥에 선 데미안의 중년의, 노년의 삶이 궁금하다. 삶의 어느 단계에 다다랐건, 우리는 잘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평생 내면의 자아와 싸우며 <데미안>을 집필한 헤르만 헤세에 대한 부채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지금 굴곡 없는 평지를 걷고 있다. 그건 확고한 내 의지의 결과물이다. 앞으로 가파른 경사의 오르막이 몇 번은 다가올지, 그때마다 나는 '무심한 정성'을 향한 내비게이션을 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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