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운을 선물한 광명동굴

-봄의 발걸음-

by 수다쟁이


답답한 일상이 계속되는 즈음 가까운 곳으로 딸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인터넷 서핑을 계속했다.

서울시내에 무슨 동굴이 있지?

석탄 캐던 곳? 석탄은 태백 삼척에서만 캤던 거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갖으며 검색해 본 광명동굴은 석탄을 캐던 곳이라 하기엔 너무 잘 정돈되고 멋지고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별로 재미없을 거 같다는 아이에게 엄마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졸랐다.

가끔은 아이를 위한 발걸음에 나의 욕망도 한 스푼 넣고 싶은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감정을 이입시킨다. 분주하게 아침을 때우고 비가 부슬부슬 올 거 같은 날씨가 좋은 징조이길 기원하며..

일찍 도착한 광명동굴은 올라가는 길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다. 데크로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으며 부지런을 떤 몸과 마음을 칭찬했다.

길을 따라 핀 봄꽃들과 눈인사를 하며 한송이 툭 꺾어 귀에 꽂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고

한껏 과장된 표정으로 사진 속에 봄과 딸을 붙잡아 두었다.




야~~

여기 되게 춥다 여름에 오면 딱이겠는걸!

어두운 동굴에서 더 빛을 발하는 LED 화려한 불빛은 '환상의 나라로 오세요~~'

하는 놀이동산의 시그널 음악과도 흡사하게 화려하게 빛나고 아름다웠다.


석탄을 캐러 깊이 들어갈 때 탔다던 광차는 딸에게는 놀이기구를 연상시켰다.

광부들의 쉼터였던 선녀탕은 옛날 옛적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선녀가 정말 목욕이라도 하러 올 것 같은 신비감을 주었다.

딸은 그곳에 들어가 수영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무나 들어가면 신령님이 노하신다고 겁을 주었다 ^^

피~~ 하며 이젠 그런 말에 속을 나이가 아니라는 듯 시니컬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금도끼 은도끼를 들고 신령님이 나타날 거 같은 신비스러움에 몸이 움찔거렸다.


오랜 옛날 광부들은 목숨을 걸고 노다지를 캐고 싶은 희망을 동굴벽에 적어 놓았다고 한다. 낙서와 그림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잠시 그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 그 마음을 되뇌어보았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 그 애절했던 희망의 깊이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음에 마음 한구석이 조금 무거워지기도 했다.

폐광촌이란 기형도의 시에서처럼 그들은

석탄에 삽날을 꽂으며 각자의 생을 퍼담고 있었으리라.


다리가 아파 살짝 지쳐 갈 때쯤 동굴의 끝자락에 동굴의 100년 역사 전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들어갈 때의 신기하고 화려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우리 근대사의 아픔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동굴은 광부들의 고된 삶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의 수탈의 현장이기도 했고

6.25 전쟁의 피난처로 사용돼 그곳에서 아기를 낳고 키우던 모습도 재현되어 있었다.

삶의 고단함과 안쓰러움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짠했다.

딸도 낯선 풍경들에 잠시 머뭇거렸다.




두 시간의 여정을 끝내고

동굴 밖을 나왔을 때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동굴의 여정이 마음속에 스미는 촉촉한 비였다.

마음 한구석은 묵직했고 또 다른 마음은 황홀하고 신비스러웠다.

따뜻한 커피와 어묵 국물로 두 가지 복잡한 마음을 중화시켰다.


동굴의 황홀한 체험과는 반대로 마음이

무거웠던 건 왜일까?

우리 딸은 오늘 답답한 일상을 좀 벗어날 수 있었을까?

딸은 그냥 좋았다고 했다.

아침 일찍 집에서 티브이 보지 않고

엄마 아빠랑 나올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을까?

아님 낯선 동굴의 모습이 그저 신기했을까?

아님 비 오는 날 비를 피해 천막 아래에서 먹은 햄버거와 어묵 국물이 맛있었을까?


나는 모두 좋았다

광명동굴의 낯선 모습을 본 것도 좋았고

비 오는 날 천막 벤치에 앉아 어묵 국물과 커피를 마신 것도 좋았고

노란 우산을 펴고 라라 랜드의 주인공처럼 사진을 찍은 것도 좋았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광명에서 유년기를 보낸 기형도 시인을 만나게 것도 행운이었다.

알았던 시인이지만 잘 몰랐던 시인이기도 했다.

가늠하기 어려운 마음을 담아 시를 썼던 시인.

지금도 차마 짐작하기 어려운 마음이 읽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서점에 들러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집어 들고 며칠 동안 그의 삶과 그의 언어들로 마음 가득 기분 좋은 먹먹함을 느낄 수 있었다.

딸에게도 주절주절 이야기를 했다.


몇 시간의 짧은 여행이 며칠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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