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듣고 "시작하겠습니다"를 외쳤다.
때론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을 품으며 달려온 길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잘 달리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도 멈출 수 없었다.
속으로는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학원에서 보는 시험이지만 외부 심사위원들은 세밀하고 깐깐하게 심사를 하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이까짓게 뭐라고'하는 뱃심을 두둑이 넣어두고 단단히 앞치마 끈을 조였다.
사전 준비가 시작되었다. 큰 실수 없이 가던 중
원두가루를 확인하는 걸 까먹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예열시간 동안 원두가루를 확인하고 예비 추출을 했다. 의외로 마음이 진정되었고 속도는 빨라졌다.
1분이 남은 시간에 정리를 마치고 손을 들었다.
"사전 준비 끝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추출이다. 앞선 조가 시험 보는 걸 지켜보니 추출 시간이 너무 빠르다. '어쩌지?'
그러면 원두 양을 많이 하고 탬핑을 세게 꾹 눌러야 한다.
순간적인 판단을 했음에도 커피 추출 속도는 너무 빠르게 쏟아졌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나는 첫 번째 추출의 양을
조금 많게 추출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인 나의 판단이 옳았기를 바라며
두 번째 추출은 양을 조금 더 많이 탬핑을 조금 더 세게 했다.
이번에는 얼추 양과 시간을 맞췄다.
심사위원 두 분이 체크를 하셨는데 그분들을 나의 부엌에 초대한 지인처럼 생각했다.
나보다 조금 연배가 있는 언니와 어린 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커피를 타 주길 기다리고 있구나! 생각하니 떨리던 마음이 사라지고
몸에 익은 순서는 몸이 알아서 기억해주고 있었다. 늘 그렇듯 정성을 들인 시간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맛있게 드세요~~^^"하며 에스프레소를 제출하고 카푸치노를 시작했다.
우유를 낭비하는 양도 체크를 하는 것 같아서 우유를 적당량 따르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했다.
그다음은 스티밍이다. 첫 번째 스티밍은 성공 두 번째 스티밍은 뭔가 아쉬웠다.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카푸치노 잔을 기울여 푸어링을 시작했다. '하던 대로 하면 돼~ 자신 있게'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우유를 에스프레소 깊은 곳에 떨구었다. 다행히 경계는 흐트러지지 않고 동그란 모양이 나와주었다. 마지막 카푸치노에 우유 양이 아주 조금 모자랐던 것 빼곤 그런대로 만족할만한 카푸치노였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를 외치고 돌아와 청소를 끝냈다.
나는 이미 어느 카페의 잘 훈련된 아르바이트생 같았다.
그리고 연습했던 시간보다 30초 이상 시간을 단축했다. 긴장감 때문인지 몸에 이미 배어버린 익숙함때문인지 모든 과정들은 빈 틈 없이 마무리되었고 스스로도 약간은 뻘쭘할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9분이 넘지 않음)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끝났습니다"를 외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커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젖은 행주를 안고서 바깥을 내다보니
해는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어둠이 스며들어 가라앉은 마음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해방감, 뿌듯함, 허탈감. 아쉬움에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챙겨 나오지 않은 사람처럼 지난 두 달간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20년 만에 처음 치른 평가는 힘든 과정 속에 내가 다시 한번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주부라는 시간 속에 커피를 배우는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첨가하니
두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조금은 버거웠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흥분과 만족감이 컸던 날들이었다.
어르신들을 보면서도 젊은 사람보다는
더디고 느리지만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무언가를 하시려는 모습 속에 나의 10년 후 20년 후의 얼굴이 그려지기도 했다. 존경스럽기도 하고 삶에 대한 열정이 느껴져서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바리스타라는 목적, 그리고 또 다른 자아실현을 위해 나선 젊은 주부들과도 서로 친구가 되어서 가르쳐주고 배우기도 하며 재밌는 수다로 웃음을 나눌 수 있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 속에 어우러져야 행복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었다.
커피는 항상 나에게 인생의 동반자였다.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살펴보고, 위안을 주는 따뜻한 친구~~
그 친구를 늦게 알게 돼서 조금은 아쉽다.
조금 더 일찍 알게 됐다면 조금 더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을 텐데..
원두의 종류에 따라 커피의 향이 다르듯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맛과 향기로 기억될까?
고급 커피처럼 깊고 그윽한 풍미가 입안에 오래 머무르는 매력적인 사람이고 싶다. 커피를 배우려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잠시 멈춰 서서
커피잔에 담긴 나의 멋진 삶과 그윽한 향기를 꿈꿔본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 더없이 기쁘다.
그리고..
이 시간이 옅어지면 그라인더의 딸깍딸깍 소리와 포터 필터의 그립감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