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볼까

나르시시스트 엄마

by 어차피 잘 될 나

어릴 때 글 좀 잘 쓴다는 말을 듣곤 했다.

모의 논술셤을 볼 때도 내 점수는 높았고

난 내 자존감이 높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못하는 것도 많지 않았다.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스스로 자존감을 꽤 높을 만 했는데

나는 왜 그렇게 움츠려들기만 했을까

나는 왜 나 자신을 경멸했을까


그런 궁금증들이 결국 원가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됐다.


난 나르시시스트 엄마와 엄마의 심기를 조금도 건들지 않고 눈치만 보는 아빠를 뒀다.

아빠는 정말 양반 중의 양반 같은 분이신데 엄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시는 분이셨다.

그 분들 사이에 나와 내 동생이 태어났고

동생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쭉쭉 성장해나갔고

그에 비하면 나는 잘하는 게 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잘하는 게 없는 아이,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 예쁘지 않은 아이, 못난 아이

엄마 눈에, 가족 눈에 나는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동생의 앞길을 막는 첫째라는 늬앙스로 나를 구박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서적 학대가 심한 건데 어른은 아이에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우리 엄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한 나르시시스트의 엄마 아래에서 나는 경제적 독립을 하기 전까지 아니 경제적 독립을 해서도 나는 엄마의 강렬한 비난을 이겨내야 했다.


30대 후반에 나르시시스트라는 용어를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한 자료들을 훑어본 후 나는 그 안에서 살아난 생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끔찍한 지옥같은 원가족과의 생활은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돌아가기 싫은 시간과 공간들이다.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은 참혹하다.


처음엔 엄마에 대한 거부감, 서운함이 컸고 나중에는 방관자인 아빠에 대해서도 서운함이 생겼다. 물론 내가 예쁜 아이가 아니였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옆에서 응원해줘야 하는 사람들인 그 아이를 세상의 빛을 보게 한 부모들이다. 근데 끝도 없이 상처투성이로 만든 사람들이다.


엄마의 화풀이 대상은 나와 아빠였다. 아빠는 그래서 늦게 귀가하셨고 그래서 화풀이 대상은 늘 나였다. 화풀고 자기 기분대로 하려고 나를 낳은건가?!


언젠가 나는 엄마한테 왜 그랬냐고 왜 차별하고 왜 나한테 화만 내냐고 물었다.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단다. 가해자는 기억 못한다. 그리고 늘상 해왔던 화풀이, 분풀이였기에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거지.


사람들은 어릴 때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냐고. 왜 그 시절의 기억까지 꺼내보면서 사냐고 한다.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게 아니고 깊숙한 세포에까지 각인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어릴때로 끝났으면 희미해진단다. 하지만 딱지 난 곳에 아물만 하면 또 딱지 생기고 딱지 생기고 그러면 흉터로 남는다. 그 안에서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나니까 살아남았다고 자부(?)한다. 그 덕에 나는 인내심이 참 높다. 이 인내심이라는 게 높아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웬만한 건 참아버리니까 그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손절이 늦어진다는 단점? 견딜만 하니까.


글을 써볼까로 시작해서 나르시시스트 엄마 이야기부터 쓰는 것 보면 나는 뼛속까지 사무친게 참 많나 보다.

그런 나를 보면 참 안쓰럽다. 가장 따뜻한 격려를 보내줄 존재인 엄마는 내게 가장 거부감 들고 잔인하고 나를 제일 지옥을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다. 너무 싫다.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나는 지금 내 안에서 투쟁중이다. 이제는 나를 내가 지켜줄거야. 더이상 나를 불쌍한 아이로 두지 않을거라는 강렬히 나를 지키고 보호해 나가는 중이다.


글을 쓰다보면 나의 이런 다친 마음들도 치유가 되겠지. 회복을 위한 글쓰기이기도 하고 또 다른 상처받은 누군가를 위한 글이기도 하다. 한 명이라도 내 글을 보고 공감하고 힘을 낸다면 난 만족한다.


오늘 글은 여기까지 쓰려한다. 생존자인 나를 위해 커피 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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