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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숫제 Apr 02. 2024

플라톤_1

우리가 모두 ‘인간’인 이유도 인간이라는 이데아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치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정치에 무관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치를 더 깊이 고민했죠. 그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가 정치인이 되거나, 정치를 하는 사람이 철학자처럼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정치인을 철학자로 키우기 위해 시칠리아 섬에 있는 도시 시라쿠사의 독재자 디오니시오스 1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에게는 실험적인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디오니시오스 1세는 철학을 배울 만한 사람이 아니었죠. 디오니시오스 1세는 플라톤을 정치에 이용하려다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자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다행히 철학자 아니케레스가 노예 시장에서 플라톤을 발견합니다. 아니케레스는 플라톤의 몸값을 지불해주고 플라톤이 아테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플라톤은 아테네로 돌아와서 곧장 아니케레스에게 사례금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니케레스는 그 돈을 철학을 위해 쓰라며 받지 않고 되돌려주죠.     


플라톤은 그 돈으로 아테네 도시 바깥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학교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카데모스의 이름을 따서 ‘아카데미아’(Ἀκαδημία)라고 불렀고요. 오늘날 대학이나 학회 등을 뜻하는 아카데미(academy)의 유래가 된 곳입니다. 지금은 작은 표지판과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새로운 철학자 플라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볼까요?     


[플라톤 등장]     

(플라톤) 아테네는 부패한 지도자들이 무지한 대중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돈을 받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죠.     


그러니, 모든 논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좋은 정치를 생각해내기 위해서라도 체계적으로 차근차근 철학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동굴의 비유’를 여러분께 들려드리죠. 잘 들어보세요.    

 

Danielle Maillet-Vila, Plato's Cave, Painting, 74 x 91, 2014.


동굴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거기 죄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수들은 온몸이 사슬에 결박되어 동굴 입구 쪽을 볼 수가 없습니다. 평생 동굴 벽만 보며 살아온 거죠. 그 벽에는 동굴 입구에서 비치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그림자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겠지요. 그러다 한 죄수가 사슬에서 풀려나 동굴 밖으로 나갑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할 겁니다.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못 보겠지요. 그러나 차츰 모든 것이 선명해집니다. 나무들, 꽃들, 강물과 바람 그리고 구름까지. 그리고 그 모든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태양 빛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곧 그 죄수는 깊은 연민을 느낍니다. 동굴 안에 있는 동료들이 떠오른 겁니다. 그곳 사람들은 그림자가 전부인 줄 알지만, 실제의 세계는 초록빛이 무성한 싱그러운 여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수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죄수들에게 알려줍니다. 동굴 밖 세상이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동굴 안에 있는 죄수들은 그 죄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동굴 밖을 다녀온 죄수는 동굴이 너무 어두워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습니다. 동굴 안 지식인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동굴 벽 그림자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고요. 죄수들은 동굴 밖을 다녀온 죄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의심하고 모함했습니다.     


만약 동굴 밖을 다녀온 죄수가 다른 죄수의 사슬을 풀어 동굴 밖으로 끌고가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죄수들은 그 죄수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소피) 소크라테스 비유인가요?     


(플라톤) 나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한 것은 진리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 말입니다. 현상에만 머물면 실재를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실재에 관한 앎입니다.     


(필로) 현상과 실재의 구별. 누가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소피) ‘사제파제’, 사제지간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요.  

   

(필로) 맞아요, 맞아!     


(플라톤) 우선 실재와 현상을 구별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기억해두십시오. 어두운 동굴 안의 세계와 밝은 동굴 밖의 세계는 분명 존재합니다. 현상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현상에만 머물러 있으면 실재를 놓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지식은 현상에서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실재를 탐구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현상만을 놓고 보면 거대한 힘이 무서운 권력과 난폭한 폭력이 정의(正義)인 것처럼 보이겠지요. 눈으로 보면 정의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의(正義)의 그림자를 보면서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할 수는 없습니다. 정의(正義)의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식의 한계 때문에 동굴 밖을 쉽게 확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동굴 밖을 나가는 일은 가능합니다.     


동굴 안에 있는 인간을 강제로 동굴 밖으로 끌어내는 행위, 그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데오) 강제요? 교육을 꼭 ‘강제’로 해야 하나요? 학생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교육 아닌가요?     


(플라톤) 나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즐겼지요. 사람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깨닫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강제적으로라도 대화를 해야 교육을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서 강제는 필수입니다.    

 

(필로) 교육이 강제로 이루어지면 부정적인 효과만 낳을 것 같은데요.   

  

강제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 의무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대부분 국가에서 의무 교육을 시행하고 있잖아요.     


(소피) 중학생 때 음악 수업을 인상 깊게 들었거든요. 그때 음악 선생님이 클래식뿐 아니라 재즈, 대중가요, 힙합, 트로트, 동요를 사람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연결해서 가르쳐주셨어요. 해방과 자유를 추구하는 감정을 재즈와 연결하거나, 답답하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직선적인 가사를 플로우와 라임이 있는 랩에 연결하셨어요. 그래서 그때 슬픔을 가벼운 흥에 실어 나르고 싶을 때 트로트를 부르거나, 복잡한 마음을 해소하고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상태로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동요를 부르면 좋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선생님은 제게 음악의 세계를 선물해주신 분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중학교에 다니는 것이 의무 교육이네요.   

  

(필로) 그러면 말이 되네요.


Jean Delville, L'école de Platon, Huile sur toile, 260 x 605, 1898.


(플라톤) ‘분리된 선분의 비유’를 건물에 빗대어 이야기해드리지요. 4층 높이의 건물을 떠올려보세요. 1층은 가장 낮은 단계의 인식 혹은 지식이라고 합시다. 4층은 가장 높은 단계의 지식입니다.  

   

1층과 2층은 ‘가시계’(可視界), 곧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3층과 4층은 ‘가지계’(可知界)입니다. 가지계는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죠.   

  

나는 가시계에 관한 지식을 ‘의견’(δόξα)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이라 부를 수 없는, 의견에 불과한 의견 말입니다. 통속적인 생각일 뿐인 속견(俗見)이나 근거가 없는 주장을 일컫는 억견(臆見)이라고도 부릅니다. 반면에, 가지계에 관한 지식이 그야말로 ‘지식’(ἐπιστήμη)이지요.     


2층에서 시작해봅시다. 가시계에 해당하는 2층은 눈으로 보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비행기를 타고 건너온 지중해 바다의 색깔을 기억합니까? 코발트블루였나요? 해질녘 서쪽 바다도 그와 같은 색깔일까요?     


여러분의 나라에는 아름다운 섬이 있다지요? 그곳의 바다색도 지중해의 바다색과 같은가요? 바닷물을 손으로 떠보세요. 푸른색이 아닙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는 지식은 불완전합니다. 눈으로 보는 지식은 그것이 코발트블루라고 믿을 뿐입니다.     


1층으로 내려가 볼까요? 여러분 중 누군가가 저 지중해 풍경을 그렸다고 해봅시다. 그 바다 그림은 바다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그림자일 뿐이고, 허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실제 바다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상상을 그림 속에 담아 우리의 감각을 자극합니다.

    

화가의 왜곡은 그나마 봐줄 만하지만, 시인들과 수사학자들에 의한 단어의 왜곡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들이 정의(正義)의 의미를 왜곡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왜곡에 현혹됩니까? 트라시마코스가 정의에 대해 하는 말을 들었습니까? 그런 것이 정의를 왜곡합니다. 소피스트는 궤변론자입니다.     


3층으로 올라갑시다. 이제 우리는 가시계에서 가지계로, 의견에서 지식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이성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모든 삼각형은 진짜 삼각형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삼각형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하학은 삼각형을 정확히 추론해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삼각형을 지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수학자와 기하학자는 우리를 지성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내가 세운 아카데미아 출입문 현판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오지 말라’라는 글귀가 쓰여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3층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 4층으로 올라갑시다. 3층은 사물 각각을 수학으로 표현했습니다만, 4층은 바다 그 자체를 알게 됩니다. 바다의 ‘형상’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참된 앎에 도달합니다. 형상에 대해 이해할 때 지식 그 자체에 다다른 것입니다.     


(필로) ‘형상’이라면 피타고라스가 말했던 ‘모양’ 아닌가요?     


(플라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피타고라스의 형상론과 나의 형상론은 그와 다릅니다. 그래서 나는 형상보다 이데아(ἰδέα)라는 말을 더 선호합니다. 백인과 흑인, 신생아와 노인, 여러분 각각과 내가 서로 다르지만 우리가 모두 ‘인간’인 이유도 인간이라는 이데아 때문입니다.   

  

이데아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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