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음의 이데아가 모든 존재의 근거이자 인식의 근거입니다
이데아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플라톤) 그러지요. 바다 그 자체, 바다의 실재, 그것이 이데아입니다. 이데아는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므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통해, 이성을 통해, 사유를 통해 비물질적인 이데아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데아가 사물의 본질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그것의 본질인 이데아를 모방한 것입니다. 모방한다는 말 대신 사물이 이데아에 참여한다거나 사물이 이데아를 분유(分有)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하는 사물들은 이데아를 분유한 결과입니다.
(소피) 분유한다는 게 무슨 뜻이죠?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이 꽃이 꽃의 이데아를 나누어 가졌고, 우리 각 사람은 인간의 이데아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소피) 꽃이 꽃의 이데아를 나누어 가져서 꽃인 거네요.
(플라톤) 이데아는 영원불변하기 때문에 이데아를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 한 지식의 절대성은 유효합니다.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보이는 것 너머의 실재를 보지 못해 지껄이는 의견에 불과합니다. 상대적인 존재를 지식의 대상으로 삼으니 그들의 지식 또한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눈은 뜨고 있으나 영혼의 눈은 감고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앞에 있는 이 청노루귀 꽃은 아름답습니까? 그렇다고 답하겠지요. 그러면 그 옆을 기어가는 딱정벌레는 아름답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청노루귀 꽃이 딱정벌레보다 아름답습니까? 그렇다고 하겠지요.
자,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꽃이 벌레보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그 기준에 따라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는 것입니까? 아름다움 말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꽃이 벌레보다 아름답다거나, 아니면 벌레가 꽃보다 아름답다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애초에 아름다움이 없는데 꽃이 벌레보다, 벌레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름다움’이 존재해야 합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 그것이 이데아입니다.
(소피) 아름다움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도 이데아가 있다는 얘기네요.
플라톤은 꽃, 사자, 인간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도 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름다움, 정의, 좋음과 같은 개념들도 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먼지, 진흙과 같은 것들은 이데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필로) 아름다움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요? 아름다움의 이데아라니요! 이데아가 어디 있나요?
(플라톤) 다시 한번 말합니다만, 이데아는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와 떨어져 있습니다. 이데아는 가지계에 있습니다. 1, 2층과 구별된 3, 4층 이야기를 했잖아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계와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지계.
가지계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이성으로, 사유로, 생각으로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데아를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사유를 통해 보려고 해야 합니다.
이데아의 세계가 실제의 세계이기 때문에, 사물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본질이 이데아에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꽃이 사라져도 이데아에서는 여전히 꽃이 존재하고, 꽃이 사라질 때 꽃의 아름다움이 함께 사라진다 해도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계속됩니다.
이데아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를 영원과 시간, 존재와 변화, 하나와 여럿, 지식과 의견, 선과 악으로 구별할 수도 있지요.
(플라톤) 인간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여야겠군요.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영혼은 이데아에 관한 지식을 소유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데아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내려오다가 망각의 강을 건넙니다. ‘레테(Λήθη)의 강’이죠. 이 강을 건너면서 영혼은 이데아에 관한 지식을 잃어버린 채 육체와 결합합니다.
(소피) 이데아에 관한 지식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찾게 되는 거죠?
(플라톤) ‘상기’(想起)를 통해 얻습니다. 다시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사물이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으니 사물을 통해 이데아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이죠. 수많은 꽃을 보고 꽃의 이데아를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물론, 혼자서 상기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마치 혼자 사슬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지요. 소크라테스와 같은 좋은 스승이 있다면 상기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강조했던 대화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수학 선생은 학생이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돕잖아요. 잃어버린 이데아에 관한 지식을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에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이야기해주시죠.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서 이야기했었지요. 동굴 밖을 나간 사람이 그림자가 아니라 진짜 세계를 보았다고요. 그 사람이 진짜 세계를 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데오) 태양의 빛 때문 아니었나요?
(플라톤) 맞습니다. 태양 때문에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태양에 해당하는 것이 ‘좋음의 이데아’입니다. 좋음의 이데아가 모든 이데아 중 최상위 이데아입니다. 이데아는 위계가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눈으로 보는 대상에 가까워져 구체화되고, 위로 올라갈수록 추상화됩니다. 빨간 아오리 사과에서 빨간 사과로, 빨간 사과에서 사과로, 사과에서 과일로 점점 추상화되지 않습니까.
모든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에 속합니다. 태양 빛이 사물을 인식하게 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것을 인식하게 해줍니다. 이데아들은 좋음의 이데아를 모방하고 사물들은 이데아를 모방하니, 좋음의 이데아가 모든 존재의 근거이자 인식의 근거입니다.
(소피) 인간도 좋음의 이데아를 모방했겠네요.
(플라톤) 그렇습니다. 인간도 좋음의 이데아를 많이 모방한 좋은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존재합니다.
윤리학으로 넘어가야겠네요. 인간 영혼의 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주시죠.
(플라톤) 우선 인간의 영혼이 이성과 비이성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이성이 비이성보다 중요합니다. 비이성적인 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기개와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성, 기개, 욕망입니다. 앎을 추구하는 이성은 무엇이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기개는 행동을 하기 위한 충동, 용기입니다. 욕망은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본능입니다.
기개와 욕망은 두 마리의 말과 같습니다. 기개는 선한 말이고 욕망은 악한 말입니다. 이성은 마부이지요. 두 마리의 말과 마부가 제 역할을 할 때 인간의 영혼은 좋은 상태가 됩니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말한 아레테(ἀρετή), 인간으로서의 탁월함을 얻으려면 이성, 기개, 욕망이 제 기능을 해야 합니다.
기개가 마부가 되거나 욕망이 마부가 된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마차가 제대로 갈 수 있을까요? 무질서가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욕망이 이성을 압도하면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무지로 인해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이성이 마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롭고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삶이 가능하지요. 마부가 말들을 조절해야 합니다.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조절해야 합니다.
(소피) 욕망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나요? 이성이 욕망을 조절하면 말을 메마르게 할 것 같은데요.
(필로) 밤 열 시 치킨의 욕망을 조절하지 않으면 다음 날 속이 더부룩하더라고요.
(데오) ‘밤열시치킨’이라는 브랜드가 있는 줄 알았어요. 사람이 욕심대로 살면 안 되겠지만, 이성이 욕구를 너무 억압해도 불행할 것 같아요.
플라톤이 말한 인간 영혼의 세 부분을 오늘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현대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친 프로이트의 성격 구조 이론이 플라톤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이드(id)는 성적인 충동을 비롯한 무의식적이며 본능적인 충동을 의미합니다. 초자아(super ego)는 부모로부터 받은 도덕규범과 사회적 양심을 의미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적인 문제는 초자아가 약하고 이드가 강해서 충동적인 행동이 삶을 지배하거나, 강한 초자아로 인해 이드가 억압되어 행동을 위축시키거나 긴장과 불안을 일으킬 때 발생합니다.
결국, 치료는 이드와 초자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자아(ego)를 강화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집니다. 플라톤에게 이성은 욕망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욕망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절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플라톤) 이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이성은 탁월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유일한 도구입니다.
무지가 곧 악입니다. 악이 어디 있습니까? 악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악은 바로 여러분의 정신 안에 있습니다.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을 때 악이 발생합니다. 알고자 하지 않을 때, 무지에 만족할 때 악이 발생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입으면 기개와 욕망이 더욱 활개를 칩니다. 이성이 중개자 역할을 해야 비로소 선한 삶, 좋은 삶이 가능합니다.
인간으로서의 탁월한 삶, 좋은 삶은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조절해 각각이 제 기능을 하게 될 때 가능합니다.
플라톤의 윤리학이 그의 존재론과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나요? 이데아와 영혼과 이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좋은 이데아’와 ‘좋은 인간’이 이론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그의 정치철학은 존재론과 윤리학과 연결됩니다. 플라톤은 국가를 거대한 인간으로 보았거든요. 그는 윤리학을 고스란히 정치철학으로 옮겨놓습니다.
(플라톤) 드디어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게 됐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