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풍부한 플라톤은 잊으세요
다음으로 만날 철학자는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이 세 스승과 제자는 참된 앎을 추구하는 진리의 철학자였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이 생각한 진리는 서로 달랐습니다.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 각각을 따르는 사람들의 갈등과 분열로 번질 만큼 차이가 상당했습니다. 서양 철학의 역사 전체를 플라톤 진영과 아리스토텔레스 진영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들 진영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열일곱 살에 아카데미아에 들어가 플라톤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20년 후 플라톤이 죽자 아카데미아를 떠납니다. 플라톤의 애제자였지만 플라톤의 철학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같은 자신만의 학교를 세웁니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학교 리케이온(Λύκειον)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산책하면서 가르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걷다’라는 뜻으로 ‘소요(逍遙)학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 아카데미아에서 트라시마코스를 만났던 제우스 신전 방향으로 가다가 국립정원 앞에서 왼쪽으로 틀면 됩니다. 한 시간 정도 걸리니 우리도 소요학파처럼 산책하며 걸어가 볼까요?
[아리스토텔레스 등장]
(아리스토텔레스) 어서 오세요. 아카데미아에서 오는 길이라지요? 플라톤은 우리의 좋은 친구입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더더욱 좋은 친구입니다. 플라톤이 소중한 게 아니에요. 진리가 우리에게 훨씬 소중합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스승에 맞설 수 있어야 해요. 여러분이 그 지겨운 이데아 이야기를 듣고 왔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워하는 말입니다. 플라톤의 이야기는 잊는 게 좋겠어요. 이데아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은 그저 새의 지저귐에 불과해요.
(소피)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비슷한 사람을 만나니 반갑네요.
(아리스토텔레스) 나도 반가워요. 상식적인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분 같아 좋군요. 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플라톤보다 진리를 더 소중한 친구로 두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나의 ‘실체’ 이론이 ‘이데아’를 대체해야 하는 이유도 알게 될 테고요.
실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전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진리를 다루는 ‘도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도구란 ‘언어’를 뜻하지요. 철학은 진리를 탐구해요. 나에게 철학은 과학이기도 합니다. 진리를 말하려면 언어 문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지요. 나는 이 문제를 ‘오르가논’(ὄργανον)이라고 부릅니다.
‘오르가논’은 논리학을 의미합니다. ‘오르가논’의 원래 뜻은 ‘도구’입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을 말 혹은 생각의 규칙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의미의 ‘로기케’(logike)라고 불렀고, 그 단어가 오늘날 ‘논리학’(logic)이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철학을 펼치기 위한 도구로 논리학을 정립한 것입니다.
(소피) 철학을 위한 도구, 흥미로운데요!
(아리스토텔레스) 진리에 도달하려면 언어에 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해요. 과학의 언어는 다른 언어와 구별될 때 진리의 언어가 될 수 있어요.
예를 들어보지요. 여기 파란색 난로 위에 빨간색 주전자가 있고 주전자 위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고 해봅시다. 그때 누군가가 그 장면을 보고 ‘빨간색 주전자를 파란색 난로 위에 올려두면 수증기가 생기는구나’라고 말한다면 이건 과학의 언어가 아니겠지요.주전자나 난로의 색깔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열이 물을 수증기로 만든다’가 과학의 언어예요.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내가 발견한 언어의 특징 중 하나는 ‘범주’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주어와 술어로 되어 있지요. 설명을 하려면 주어와 술어가 반드시 필요해요. 그런데 술어 부분이 아홉 가지 범주로 되어 있어요. 우리가 무언가 설명하려면 그것은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으로 표현해야 하지요. ‘우리가 걷는다’면 ‘걷는다’는 ‘상태’가 술어이고, ‘열이 물을 수증기로 만든다’면 ‘만든다’는 ‘능동’이 술어이고요. 그러니까 범주란 술어의 종류를 의미해요. 인간의 언어는 이 범주를 벗어나서는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어요.
(필로) 진리에 관해 말하려면 이 범주를 이용해야겠군요.
(아리스토텔레스) 아홉 개의 범주에 실체에 해당하는 범주인 ‘주어’를 추가해야 합니다. 주어 그 자체가 하나의 설명이기 때문이지요. 총 열 개의 범주가 있는 셈이죠.
우리의 언어의 또 다른 특징은 내가 ‘삼단논법’이라 부르는 것이에요.
(필로) 삼단논법에 대해서는 들어봤어요.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 훌륭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전제가 참일 경우, 결론 즉,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가 반드시 참이 된다는 게 내가 발견한 인간 언어의 특징이에요. 이 특징을 이용하면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가 참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요. 모든 전제의 전제, 궁극적인 전제는 사물의 본질, 즉 ‘실체’입니다. 궁극적인 전제가 참이려면 우선 ‘실체’가 규명되어야 합니다.
(소피) 다시 나왔네요. 실체.
실체라는 말은 ‘존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우시아’(οὐσία)가 라틴어 ‘숩스탄티아’(substantia)로 번역되면서 ‘사물의 아래 있거나 근거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물의 기초, 존재의 근원, 근본적인 존재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실체라는 말의 의미를 철학자마다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각 철학자가 이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그래서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실체는 무엇인지 들어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 나의 실체 이론이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대체해야 한다고 내가 말했지요. 잘 들어보세요. 플라톤은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꽃, 나무, 고양이, 인간은 모두 이데아에 있는 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깎아내렸지요. 그러나 이것은 틀렸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들이에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별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한 것이지 이데아가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소피, 데오, 필로, 당신들이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말하는 실체란 이런 것들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저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여기에 있는 것들 말입니다. 실체는 주어로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소피는 인간이다’라고 하면 인간은 주어의 자리에도 있을 수 있고 술어의 자리에도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인간은 소피이다’ 이렇게 소피가 술어에 사용될 수는 없지요. 실체는 소피처럼 다른 것들과 분리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를 뜻합니다.
(데오)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그림 속에서 플라톤이 손가락 하나로 위를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손을 펼쳐 아래로 향했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네요.
(소피) 그 그림에서 플라톤은 왜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을 펼친 걸까요?
(필로) 플라톤에게 인간 이데아는 ‘하나’(일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 실체는 ‘여럿’(다자)이기 때문일까요?
(소피) 탈레스에서 시작한 하나와 여럿이 계속되네요.
(아리스토텔레스) 실체의 ‘속성’도 있어요. 여기 이 단풍잎이 노랗다고 할 때, 노란색이 단풍잎의 속성이에요. 속성은 실체에 속하는 특성이에요. 속성은 실체에 의존하여 존재해요.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속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요. 플라톤은 노란색이라는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했지요. 아닙니다. 노란색은 단풍잎의 속성일 뿐이에요.
결국, 존재론에서 핵심은 ‘실체’예요. 탈레스가 ‘물’이라고 한 것,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라고 한 것은 실체에 대한 그들 나름의 설명이었지만 부족해요. 내가 설명을 해볼게요. 차근차근 잘 들어보세요.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말한 형상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불렀지만, 나에게 형상은 보이지 않는 저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형상은 실체 안에 있어요. 질료는 실체의 물질적 재료예요. 그러니까 형상과 재료가 결합한 것이 실체지요.
실체 바깥에 형상이 있다거나, 재료 없는 형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형상 없는 재료가 있을 수 없어요. 모든 게 실체예요. 사람의 실체는 형상에 해당하는 영혼과 질료에 해당하는 몸의 결합인 것이지요.
(소피) 형상이 실체 바깥에 있을 수 없다면 사람의 영혼도 사람의 바깥에 있을 수 없, 아니, 실체가 몸과 영혼의 결합이니까, 영혼은 몸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뜻인가요?
(아리스토텔레스) 그래요. 인간의 영혼은 몸과 결합되어 있어요. 영혼 없는 몸이나 몸 없는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몸과 영혼은 분리될 수 없어요.
플라톤은 몸과 분리된 영혼을 얘기하잖아요. 구체적인 개체들과 분리된 형상, 이데아 어쩌고저쩌고 말이에요. 이데아는 영원하고 불변한다고 하면서요. 그렇지만 말이에요. 우리를 포함해 자연 속의 어떤 것도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은 없어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유한하고 변하는 자연을 설명하는 게 말이 될까요?
(필로) 안 되네요.
(아리스토텔레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변하는 실체가 변하지 않는 이데아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훨씬 잘 설명합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플라톤은 잊으세요. 철학은 이 세계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이어서 변화의 ‘네 가지 원인’ 그리고 ‘가능태’와 ‘현실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