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이란 생각하는 삶이에요.
(필로) 그런데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이 다를 수도 있지 않나요?
(아리스토텔레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행복이 있어요. 탁월한 사업가가 탁월한 인간이 아닐 수 있고, 좋은 의사가 좋은 인간이 아닐 수 있듯이 행복한 목수가 행복한 인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으로서 행복하냐가 중요해요.
인간의 행복은 식물이나 동물과 달라요. 인간은 식물의 생장과 동물의 감각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지요. 식물의 영혼처럼 생장을 위해 먹어야 하고, 동물의 영혼처럼 감각의 기쁨을 채워야 만족하죠. 거기에 더해 인간의 행복은 이성을 사용하는 삶이에요. 생장하고 감각하는 일을 조율하는 이성이 필요해요. 이성의 조율이 없다면 식물이나 동물과 다를 바 없어요.
이성을 사용하는 삶이 인간으로서의 탁월함이자 최고의 행복으로 가는 길이에요. 이성을 사용해야만 인간의 고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어요. 좋은 인간이자 탁월한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는 인간, ‘생각하는 인간’이에요. 행복한 삶이란 생각하는 삶이에요.
(소피) 이성적인 사람이 아닌 나 같은 사람은 목적에 도달하기 어렵겠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 걱정 말아요. 누구나 이성을 소유하고 있고 또 제법 사용하고 있어요. 물론, 제대로 사용하려면 시간이 걸리죠. 하루아침에 되진 않아요.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이 아니듯 한순간 이성을 사용했다고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습관’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오래 계속 정의로운 일을 해야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지속해서 절제하는 일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성을 계속 사용하는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탁월한 사람이 됩니다. 앎은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에요.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말했듯이 단순히 안다고 해서 좋은 행위를 한다거나, 무지가 악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실천할 수 있어야 해요. 실천하려면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의지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 습관적 의지의 선택이 탁월한 인간을 만들어요.
(소피) 그러니까요! 내가 소크라테스를 만났을 때 이야기했었잖아요. 알면서도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있다고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속이 뻥 뚫리네요.
(필로)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무지가 곧 악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의 이름에 주눅들 필요 없어요. 철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철학자들을 만났을 때 자기 생각을 손쉽게 내버리기보다 그 생각을 어떻게 변호할지 궁구해보고 본인의 입장을 지키려고 애써보세요. 애쓰다보면 더 나은 생각이 분명 떠오를 거예요. 나만의 생각을 갖는 게 철학이에요.
(데오)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철학자의 얼굴만 봐도 위축이 되는걸요.
(아리스토텔레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철학자들은 좋은 친구지만 진리가 더 좋은 친구라고요. 생각하는 일, 이성을 사용하는 일을 멈추지 마세요. 꾸준히 습관을 들이면 분명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게 되는 철학의 봄이 올 거예요. ‘중용’을 지키는 탁월한 인간이 될 거예요.
중용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상태를 의미해요. 대담함이 지나치면 무모해지고 모자라면 비겁해지죠. 반면에, 두려워함이 지나치면 비겁해지고 모자라면 무모해지죠.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을 지켜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용기예요. 중용을 지키려면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성을 충분히 사용하는 삶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삶을 낳아요. 그러니까 최상의 삶이란 ‘이론’(theory)을 추구하는 삶이에요. ‘관조’(테오리아, θεωρία)하는 삶이죠.
(필로) 정치는 어떡할까요? 플라톤은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에요. 국가 없는 인간의 삶이란 있을 수 없어요. 사회 속에서 사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에요. 그러므로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국가를 조직하려고 하면 안 돼요.
수호 계급 전체가 공동 부부가 되고, 모두가 모든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플라톤이 주장했죠. 그는 계급 전체가 한 가족이 되길 바랐겠지만, 애석하게도 플라톤은 가족이 무엇인지 모르는 게 분명해요. 가족은 자연스러운 본능이에요. 강제적으로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국가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의해 생겨난 거예요. 국가의 통치권이 한 명에게 있느냐, 소수에게 있느냐, 전체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한 명이든, 소수이든, 전체든 통치자의 역량에 따라 좋은 국가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좋은 국가는 안전한 국가예요. 왜냐하면 국가의 목적은 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개인은 국가 없이 행복할 수 없어요.
수사학과 시학에 관해서도 간단히 언급해주시죠.
(아리스토텔레스) 그러지요. 수사학은 설득의 기술에 관한 학문이에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들은 내가 종합했지요.
나는 설득력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요인을 정리했어요. 간단히 말하면, 청중을 설득하려는 자는 신뢰할만한 성품(에토스, ethos)를 지니고 있어야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로고스, logos)적이어야 하고, 전달하려는 내용에 자신의 열정(파토스, pathos)을 담아야 해요. 그래야 청중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요.
나의 시학도 명저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시나리오 작가, 영화 감독들도 나의 시학을 즐겨 읽습니다.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시(詩)를 비롯한 예술들이 ‘모방’(미메시스, mīmēsis)하기 때문에 낮은 단계의 지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어요.
모방하는 일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행위예요. 그것 멋진 나무를 보면 그것을 따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그리고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 기쁜 마음이 듭니다. 모방하는 일 그 자체로 인간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거예요. 아이들은 모방을 통해 배워요. 플라톤이 무시한 것과 달리 모방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해요. 나쁜 게 아니에요.
나는 그리스 시인들이 쓴 비극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좋은 비극은 인간에게 카타르시스(κάθαρσις)를 제공하기 때문이에요. 카타르시스는 내가 만든 개념이에요. 감정이 정화되는 상태를 의미해요. 카타르시스란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해 연민과 공포를 느끼면서 팍팍한 삶에서 온 감정의 찌꺼기들을 배출하는 거예요.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려면 주인공이 우리의 삶을 모방해야 해요. 그러므로 시는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모방으로 인한 타락이 아니라 모방이 선사하는 기쁨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 퇴장]
(소피)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처럼 참 많은 걸 이야기했네요. 플라톤은 관심 없었던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그럼,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난 각자의 소감을 들어볼까요? 플라톤과 비교해서 생각해봐도 좋겠습니다.
(소피) 저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확실히 더 좋았어요. 이 사람은 과학자구나 싶었거든요. 이전에 만났던 철학자들 이야기와 달리 모든 것을 말끔하게 정리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감동이 부족했달까요. 감동은 소크라테스가, 정말, 제대로였어요. 소크라테스만큼은 아니지만 트라시마코스도 감동적이었고요.
가능태와 현실태가 이상했어요. 부동의 원동자가 신이라는 이야기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부동의 원동자가 정말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에게 목적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인간은 신이 만든 존재니까 신이 어떤 목적을 부여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목적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지, 꼭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나? 정리가 잘 안 되는데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필로) 살고 싶은 대로 산다는 건, 소피스트로 돌아가겠다는 뜻 아니에요?
(소피) 그렇게 되나요? (웃음) 감동은 소크라테스에게 받았는데 소피스트처럼 생각하게 되네요. 인간이 소피스트처럼 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는 힘든 삶을 살았잖아요. 저더러 그런 삶을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아요. 저는 소크라테스를 존경하는 소피스트인가봐요. (웃음)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는 깔끔했지만 답답했습니다. 아, 예술에 관한 이야기는 진짜 좋았어요. 플라톤보다 훨씬 좋았어요. 저는 이 정도 이야기할게요. 이번 여행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정리가 아직 안 된 것 같아요.
(데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에 내려앉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자신의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없앤 건 정말 잘한 일 같아요. 분리되지 않는 영혼과 육체 관계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식물에 비해 동물이, 동물에 비해 인간이 우월한 거처럼 묘사한 건 불만이에요. 생명에 등급이 있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 똑같지 않을까요? 저는 모든 생명이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성을 사용해야 인간이라는 주장은 공감하며 들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인간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성을 사용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정도예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좋은 삶을 관조하는 삶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살면 재미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가만히 앉아서 책보고, 생각하고, 연구하는 삶이잖아요. 따분하고 심심하지 않을까요? 한편으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 같은 연구자들이 그렇게 사는 걸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신나는 일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요.
예술에 관해 이야기한 부분은 놀라웠어요. 비극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지금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그가 말한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거든요.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고 있었겠구나 싶었어요.
연극 동아리를 다닐 때 연출 맡은 친구가 한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들고 다녔거든요. 그때는 연극을 하는 애가 왜 시에 관한 책을 읽을까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다시 그 친구를 만나면 그 책이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필로) 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만난 철학자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좋았습니다. 논리학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 존재를 아데아가 아니라 실체를 가지고 설명한 것, 변화를 설명해준 것, 모든 게 놀라운 통찰이었습니다. 진정한 지성인의 면모를 느꼈습니다. 왜 과학이 서양에서 발달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윤리에 대해서도 정답을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플라톤을 보완하고, 소크라테스를 완성했다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단순한 답을 이렇게 들으니 신선하기도 했고,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저는 예술이 답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예술도 틀이 있고 정답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서 새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좋았습니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는 다 좋았습니다.
이로써 탈레스에서 시작한 우리의 첫 번째 생각 여행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첫걸음 내디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깊고 넓은 보폭으로 떠날 다음 여행을 기대해도 좋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고대철학자들과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와 같은 기독교 신학자들도 만납니다. 그럼, 다음 여행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