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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숫제 Apr 30. 2024

아리스토텔레스_2

나는 부동의 원동자를 신이라고 부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어서 변화의 ‘네 가지 원인’ 그리고 ‘가능태’와 ‘현실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지요. 변화에는 무엇이 생겼다 사라지는 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일도 포함합니다. 인공적인 사물이든 자연적인 사물이든 세계에 속한 모든 사물이 변한다는 사실은 분명해요. 우리는 늘 변화를 경험하며 살죠.     


왜 변화가 일어날까요? 나는 이 질문에 답을 내놓았어요. 나는 변화의 네 가지 원인을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들이 실체의 변화를 만들어내요. 질료인은 사물의 질료로 인한 변화의 원인이고, 형상인은 사물의 형태로 인한 변화의 원인이고, 작용인은 외부의 작용으로 인한 변화의 원인이고, 목적인은 사물이 만들어진 목적으로 인한 변화의 원인이에요.     


원인이라고 해서 꼭 인과성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보통 생각하는 인과성과 달리 목적이 변화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인’ 대신에 ‘설명’을 넣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이해해도 좋습니다. 변화에 대한 네 가지 설명이라고 말입니다.     


(필로) 음, 예를 들어주시면 좋겠는데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조각상이라는 ‘형상인’, 대리석이라는 ‘질료인’, 미켈란젤로의 조각 행위라는 ‘작용인’, 두오모 대성당에 전시할 것이라는 ‘목적인’에 의해 조각된 것이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렇습니다.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연은 늘 변하고 있으니까요. 파르메니데스는 있던 것이 없어지는 일 또는 없던 것이 생기는 일이 ‘변화’라고 했지요. 하지만 이런 설명은 ‘변화’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해요. ‘변화’는 존재와 비존재의 이동이 아니라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동하는 거예요.     

(소피) ‘가능태’가 뭐예요? ‘현실태’는 지금의 처지를 말하는 건가요?     


(아리스토텔레스) ‘가능태’는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상태를 의미해요. ‘현실태’는 그 능력이 실현된 상태예요. 모든 사물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변화합니다. 변화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동하는 것이에요. 아이는 어른으로, 씨는 꽃으로 말이죠. 씨가 가능태이고 꽃이 현실태인 거죠.     


(소피) 표현이 헷갈리긴 하지만 흥미로운 구별이네요. 이렇게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아리스토텔레스) 이 구별이 많은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에요.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보세요.   

  

가능태는 현실태가 있어야 변화를 시작할 수 있어요. 현실태가 없다면 가능태는 변화의 방향이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애초에 변화를 시작할 수 없죠. 다시 말해, 현실태가 가능태보다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거예요. 현실태가 존재해야 가능태가 현실태를 향해 변할 수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달걀이 먼저 존재하는 걸까요? 닭이 먼저 존재하는 걸까요?     


(필로) 달걀이 가능태고 닭이 현실태일 테니까 닭이 먼저 존재해야겠네요.    

 

(소피) 으아, 이 논쟁이 이렇게 결론이 나나요?     


(데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었어요?     


이중섭, 닭과 병아리, 1950년대.


(아리스토텔레스) 가능태와 현실태 구별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현실태는 가능태의 목적이에요. 현실태라는 목적이 없다면 가능태는 변할 수 없어요. 꽃이 없다면 꽃이 될 씨가 있을 수 없고, 어른이 없다면 어른이 될 아이가 있을 수 없죠. 꽃과 어른은 씨와 아이의 목적인 거예요. 중요한 것은 이 목적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현실태가 가능태의 목적인이에요.  

   

이제부터 중요해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 모든 존재는 변하고 있어요. 그렇지요? 그러면 지금 세계의 상태는 가능태인가요? 현실태인가요?

     

(필로) 가능태겠네요.   

  

(아리스토텔레스) 지금 세계는 가능태예요. 세계가 계속 변한다면 변하는 동안 세계는 계속 가능태일 거예요. 그럼 이 변화가 끝나는 시점이 있겠죠. 더는 변하지 않는 상태 말이에요. 그 상태가 현실태예요. 현실태가 가능태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니 세계의 현실태는 이미 존재했을 거예요. 그 현실태는 가능태가 조금도 없는 상태, 순수하게 현실태이기만 한 상태일 거예요. 모든 변화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상태라고 볼 수 있죠. 그것을 ‘순수 현실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子)’라고도 부릅니다. 부동의 원동자는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인으로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만 자신은 순수한 현실태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현실태가 가능태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걸 생각하면 순수 현실태인 부동의 원동자는 모든 변하는 사물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했어요. 그러니까 부동의 원동자는 모든 것의 원인이자 모든 것의 목적이에요. 나는 부동의 원동자를 신이라고 부릅니다.     


(소피) 시… 신이요? 신이 ‘순수 현실태’나 ‘부동의 원동자’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네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을 여러 종교에서 숭배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신은 비인격적인 신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질료를 가지지 않는, 그래서 변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로서의 신입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개념을 기독교에서 일부 수용하기도 합니다만, 그 이야기는 중세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만나 그에게 듣도록 합시다.     


실체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이야기는 어느 정도 한 듯합니다.

     

(필로) 지금까지 형이상학이었다고요? 형이상학이 무엇인지 몰라 형이상학 이야기를 했는지도 몰랐네요.

     

형이상학이라는 말이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에 등장했습니다. 후대의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정리하면서 방금 이야기를 나눈 실체, 가능태, 현실태와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 저서를 ‘자연학’ 다음에 배치하고, ‘자연학 다음’이라는 의미로 메타피지카(metaphysika)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철학이라고 부른 것을 그 이후로 ‘형이상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 말을 다른 철학자의 이론에도 적용해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에 관한 이론도 형이상학입니다.     


이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아리스토텔레스) 그래요. 인간이 중요하지요. 인간의 영혼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인간의 영혼은 식물이나 동물의 영혼과는 구별됩니다.     


(소피) 식물이나 동물이 영혼이 있나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혼, 곧 프시케(ψυχή)는 생명의 원리를 뜻합니다. 식물이나 동물도 생명이니까요. 영혼이라고 해서 공중을 떠다니는 유령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에는 근원적인 단순물질 물, 불, 공기, 흙이 있어요. 이 네 가지 원소의 조합에 의해 자연의 많은 것들이 생겨나요. 그렇게 생겨난 것들은 영혼이 없어요. 반면에 생명체는 영혼이 있지요. 그러므로 생명체는 무생물보다 높은 단계의 존재예요.     


다시 생명체는 식물, 동물, 인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어요. 식물의 영혼은 단순히 살아 있기만 해요. 성장하면서요. 식물보다 높은 존재인 동물은 생장할 뿐 아니라 감각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을 감지할 수 있어요.     


인간은 가장 높은 단계의 존재예요. 인간은 살아 있으며,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도 가지고 있지요. 이성적 영혼을 지닌 거예요. 결국 이성적 영혼이라는 형상과 육체라는 질료가 결합된 존재가 인간이라는 실체인 거죠.     


이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어요. 형상과 질료는 뗄 수 없다는 점 말이에요. 육체가 없는 영혼이 존재하거나 영혼이 없는 육체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플라톤은 영혼이 육체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생각했지만, 잘못된 생각인 거죠. 육체와 영혼은 항상 결합되어 있어요. 


Eva Armisen, Florecer (In Bloom), Oil on canvas, 130 × 97, 2022.         


(필로) 플라톤의 이데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제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전적으로 동의가 되네요.     


(데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소크라테스가 강조했고 플라톤이 이어받은 이성을 아리스토텔레스도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 무생물, 식물, 동물과 선을 긋는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이 바로 ‘이성’이에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에요. 이성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요소예요. 이성이 없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성을 잃어서는 안 돼요. ‘아레테’, 즉 탁월한 삶은 이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삶이에요.     


(소피) ‘탁월함’이 또 등장하는 걸 보니 플라톤의 제자가 맞네요. 그런데 꼭 인간다운 삶이란 걸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나요?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리스토텔레스) 중요한 질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모든 존재는 변하는 중이고, 변한다는 사실은 모든 존재에게 목적이 있다는 의미라는 걸 떠올려 보세요. 당연히 인간의 삶에도 목적이 있지요.

     

그 목적은 모두 같지 않아요.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을 위한 목적이에요.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타는 게 목적이라면 그 목적은 회사에 도착하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목적일 거예요.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일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 목적은 집을 사기 위한 목적을 위한 목적일 거예요.     


그러나 다른 목적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있어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겠어요? 버스를 타고, 회사에서 일하고, 집을 사는 일 등등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그것은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에요.     


(소피) 정말 그래요!     


(필로) 그런데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이 다를 수도 있지 않나요?   

  

(아리스토텔레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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