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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Aug 25. 2018

<아픔이 길이 되려면> by 김승섭

#트레바리 #씀골드 #1809시즌 #9월의책

#아픔이길이되려면 #김승섭 



 아프지 않은 것이 일단은 좋다. 하지만, 아파 버렸으니, 그럼 다음에는 아프지 않게 해야 한다. 이 단순한 논리가 우리를 석기시대에서 여기까지 끌고 왔다. 모든 사회, 자연과학도 그 기원은 여기에 있다. 리처드 도킨스 아저씨가 말했듯, DNA를 전달하기 용이한 형태로 되기 위해서 자극-반응에서 나쁜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지 않고, 나쁜 자극이 없도록 환경을 '수정' 하는 단계까지 인류는 발전해왔다. 


<나는 덧없는 꿈을 달에게 듣는다> 속에서 '시마스' 가 말했듯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한다"라는 단순함이 우리의 근간이다.  문제는, 우리는 혼자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무리 마음 더듬이, 혹은 '거울 신경' 이 있어서 남에게 신경을 쓰고, 그들을 도우려 한다 한들, 우리는 남이 될 순 없다. 역지사지라는 말 역시도 마찬가지, 그 사람의 상황에 내가 처한다면 어떨지 생각해 볼 순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될 순 없다. 


 최근에 어깨 질환으로 병원에 갔다. 얼마나 아프냐는 질문을 듣는다. 솔직히 나는 그때마다 얼마나 아픈지, 고민하게 된다. 팔을 떼 버리면 차라리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그냥 나약한 현대인의 마음가짐 때문이 아닐까? 통증을 말로는 하기 힘들고 VAS 같은 척도도 있지만 마찬가지. 우리는 남이 될 순 없다. 때문에 남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 100%는 말이다. 


 때문에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주로 미디어가 그런 역할을 많이 한다. 동영상에 담아내는 모습들, 진행자의 멘트에 자연스럽게 15xx로 시작하는 모금을 하기도 했다. 시리아 내전에 대한 심각성을 담아내기 위해 VR로 이야기를 풀어낸 언론사가 있었다. 유니세프는 모금 행사를 할 때 HMD를 가지고 온다. 체감시켜 주기 위해서. 공감을 내기 위해서는 상대가 얼마나 아픈 지 알아야 한다. 병원에 VAS (시각 통증 척도) 가 있듯, 시각화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단순함 넘어서, 숨어 있는 아픔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아픔은 드러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도 이게 왜 아픈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혼자서는 또한,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사람의 삶은, 병환은 제각각이니까. 하지만 또한 그들도 정규분포 안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래서 어떤 아픔은 그 분포를 보는 사람이 드러내 주어야 한다. 개인으로써의 이웃이 다가갈 수 있는 영역 외의 부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부분은 누군가가 드러내 주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소수자' '약자'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밥 벌어먹고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영역을 드러내는 것 자체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찾아내는 것 이후의 일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들 수도 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가 말한 이야기다. "꽃이 필 것이라는,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대 없이 어떻게 나는 계속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최근에 '숲'을 옮기기 위해서 씨앗을 심자라는 이야기를 한 나는 큰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어찌 그 일을 부탁할 수 있을까, 작은 씨앗에 계속해서 관심을 주어 주세요. 발아하지 않을 수도, 햇볕이 없어 고사하거나 너무 강해 말라죽을 수도 있지만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의 관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김승섭'과 같은 연구자가 필요하다. 그런 이들이 '씨앗'을 심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소식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러니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글을 써서 다른 이들이 더 널리 읽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이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을,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주어야 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역학적으로 보았을 때 많은 문제의 원인 중 하나가 '공동체'의 붕괴로 짐작된다는 서술이 있다. 유엔의 행복지수 연구에서도 높은 행복지수를 받는 국가들(다른 요인이 부족함에도)은 대체적으로 대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낸다는 말인가. 자연스럽게 고사된 것들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 맛 개인주의의 전파가 널리 이뤄진 사회에서 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핵가족화의 진행, 대가족 붕괴와 더불어 엄청난 저출산까지 연결된 이 국가에 공동체는 어떻게 복원해야 할까. 물론, 학연, 지연 등을 통한 병폐도 걷어내야 한다. 


 어쩔 수 있겠는가. 같은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여기서부터 홍보) 씀 골드 링크(http://bit.ly/2vZjo70)


같은 씨앗을 찾아내고, 이야기를 나누며 거기에 관한 글을 쓰는 독서토론모임 트레바리 씀-골드 

홍보글입니다. 첫 책으로 <아픔이 길이 되려면>를 읽을 예정이며, '사회, 시대 진단을 하는 글' 혹은 '숫자로 설득하는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생각도 못해봤던 글쓰기를 하면서 내 생각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과 나의 삶 사이를 잇는 글짓기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신청 기간은 ~8/30입니다.



초고: 2018. 08. 25

탈고: 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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