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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Jan 05. 2018

<칼에 지다> by 아사다 지로

壬生義士傳 - 의사란 무엇인가, 인간미와 낙천성.

어머님, 간이치로는 문무에 정진하고 입신출세하여 
내 자식의 눈에 눈물이 나게는 하지 않으리다.
설령 병이 들더라도, 전장에 나가더라도 
어린 자식을 남기고 죽는 일은 없으리다.

칼에 지다 壬生義士傳 Mi-bu Gishi-Den 上  표지글 by ASADA Jirho


아사다 지로 (淺田次郞)

출생 1951년 12월 13일 
출신지 일본
직업 소설가

데뷔 1991년 소설 '빼앗기고 참는가' 
수상 1997년 제117회 나오키상
1995년 제16회 요시가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

대표작 철도원, 낯선 아내에게, 장미도둑, 안녕 내 소중한 사람, 칼에 지다


 내가 이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파리로 가다>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형이 구입하고 읽은 뒤 집 서재에 처박혀 있던 책을 고등학생 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의 대표작, <철도원>이나 <칼에 지다>와는 다르게 유머러스한 부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수험생활에 지친 난 재밌게 읽었다. 물론 <철도원> 같은 아사다 지로의 작품도 좋아한다. 명작이니까. 

 위의 대표작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파리로 가다>나 <천국까지 100마일>은 개인적으로 아사다 지로의 명작이라고 꼽는다. 오히려 <장미도둑>은 <파리로 가다>를 읽고, 내가 구입했지만 만족하지 못한 케이스이다. 어쨌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겠지.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읽은 것들을 기준으로 보면 아사다 지로의 작품에 흐르는 모든 것은 인간미와 낙천성이다. 물론 낙천성이라는 것이 <파리로 가다>와 같이 유쾌하게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으면 선 어떻게든 되겠지 노력하면 이라는 정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나에 국한되는 것이긴 하지만. 
 
 작가에 대한 부분은 언젠가 <천국까지 100마일>의 감상을 쓴다면 하겠고, 그냥 이번에는 <칼에 지다>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아사다 지로의 작품 중 이 작품과 가장 비교할 만한 책은 역시나 같은 팩션인 <창궁의 묘성>이다. 창궁의 묘성의 띠지에 광고글로 이 글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라고 강한 문구가 적혀 있는데, 그에 부합하다고 납득해 버릴 정도로 작품은 좋았다. 신은 운명을 결정하고, 인간은 운명을 바꾼다는 문장을 바탕으로 서태후와 격변기의 청말 엽을 다루면서도 개인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는 이야기 방식은  그 소소한 반전 하나하나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비틀린 운명으로 청말의 충신들이 모두 죽어나가고 도피하면서도 서태후가 나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그 매력적인 이야기 전개에 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창궁의 묘성> 보다 이 작품을 더 쳐주고 싶다. 이야기의 전개는 역시나 유사하다. <창궁의 묘성>에서 청말과 건륭제의 시대를 같이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시대의 톱니바퀴를 맞춰가는 구성은, 마지막 장면의 그 푸르른 하늘과 같이 - 종국에 작가가 말하는 바와 직결되는데 <칼에 지다>에서는 한 기자(로 추측되는) 사람이 요시무라 간이치로라는 신센구미(신선조)의 한 대원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후 메이지 유신을 거쳐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일본과 막부 말엽의 이야기를 잘 짜 맞춘다. 그 과정에서 <창궁의 묘성>의 주인공들은 시대의 변화의 축에 가장 근접한 사람들이었던 것과는 달리 <칼에 지다>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실제로 느끼는 사람들로 바뀐 것이 전부이지만.



돌을 깨고 피어나는 꽃을 
어찌하여 원수 보듯 하시오
북풍을 향해 피어나려고 애쓰는 꽃을
어찌하여 불의라 하시오.

칼에 지다 壬生義士傳 Mi-bu Gishi-Den 下 표지글 by ASADA Jirho



 실제로 요시무라 간이치로라는 사람은, 신센구미 시말 록이라는 신센구미에 대한 유일한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존재했지만, 그저 단 몇 줄의 기록만 남아 있는 - 전술한 바와 같이 시대의 변화의 축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이 인물이 작가는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작가는 어쩌면 마지막 난부의 무사로 - 그를 새로이 그려낸다. 조금 지난 영화 중에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서양의 사무라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의식의 - 어쩌면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 그 투영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칼에 지다와 같은 작품을 읽었다면 감독이 - 다르게 그리지 않았을까. 

 내가 역사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하지만 - 부끄럽게도 - 우리가 선비나 신라시대 화랑을 보는 것과 같이 일본의 사무라이와 그 의를 추종하는 집단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의식은 심지어 자국 내에서도 있었고 그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은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직결되어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나 역시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으니깐. 하지만 아사다 지로는 사무라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물상 - 휴머니즘에 근접한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의라는 것은 위에서 발췌해 둔 가족에게 가장 먼저 봉사해야 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약간 마초적인 발상에서의 접근일 수도 있지만, 아사다 지로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시대상에 맞추어서 지금과 비교해 - <영웅본색> 1편의 명대사와 같이 '강호에 의리가 떨어진지는 오래된' 이 시대에 이런 사람은 어떠한가 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해 본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다. 때로는 엄청나게 무서운 말이 될 수도 있는 말. 그러나 필요량만 섭취한다면 인격형성에 지극히 도움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이라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신성화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응당 그러한 것이라고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해 주고 싶은 것을 - 선현이 만들고 은사들이 가르친 바와 같이 베풀면 그로 족한 것이다. 

 끝없는 자아성찰이라던가 - 물론 다 좋다. 시대의 변화에 함께하자! 다 좋다. 이것은 나의 정의이다. 다 좋다. 그러나 나 자신과 내 주위의 사람을 먼저 챙기는 것을 이기주의라고 부르는 자 만은 참을 수가 없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고? 너부터 희생당해라! 가 나의 짧은 생각이다. 국가의 경제를 위해서 잠시 멈추라고? 그래- 그냥 날 이기주의자라 불러라. 그것이 내 면죄부가 될 것이니깐. - 내 생각이지만 -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나를 멈출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로 나 그 자체이고, 나를 지탱하는 내 주위의 것들이 나와 치환되었을 때 아무런 모순점을 찾을 수 없다면 - 그것은 결국 나로 하여금 끝이 없이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초고: 2008년 7월 21일

탈고: 2017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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