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쌩날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min Jan 07. 2024

<서울의 봄> by 김성수

욕망. 권력, 수권의지. 여러 가지 단어가 떠오르지만 무엇으로 시작할지 딱히 정하기 어려웠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비튼 영화들이 좀 그런 편이긴 했다. 특히, <서울의 봄> 같은 영화들은, 그 끝이, 깔끔하지 않아서 더 그렇다. <1987> 같은 영화의 끝과는 결이 다르니까. <남한산성>에 더 가까우려나? 이를 어찌 해석하고 나갈지 당최 모르겠는 느낌. 복잡한 심정이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몰랐던 이야기들. 한 번씩 들어보았을 이야기들. 아랍의 봄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이 뉴스를 뒤덮었던 지난 10년에 비해서. 그 결과물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는데 서울의 봄은 어땠는가? 김재규의 판단과 결행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 예컨대 <남산의 부장들>에 후속 편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우리는 어땠나 정말. 마찬가지로 79년 이후 10년이 더 걸렸으니까. YS 까지는 조금 더, DJ 까지는 조금 더 더.


그때의 사람들은 이제는 나이 들어서 하나씩 가고 있다. 연희동 아저씨도 갔고,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것들은? 자본이란 모이는 속성과 늘어나는 속성이 있고, 그 자본을 불의하게 모은 자들의 후손은? 우리는 연좌제를 허용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자본과 과실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프랑스가 나치 부역자들을 단호하게 처단했다고 하는데, 그럼 프랑스가 갈취한 유물들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태도는 어떠한가? 글쎄. 여러모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한 생각들만 남고, 영화에 대해서는 딱히, 덧붙일 말은 없다. 더 잘 찍을 수도 있었고, 뭐 더 냉정할 수도 있었고. 더 희망적일 수도 있겠지만, 글쎄. 김성수 감독의 전작 <아수라>에 비해서 선명하게 선, 악처럼 대비되는 그림이 좀 촌스러웠을 수 있겠으나 촌스러움보다는 그냥 그 대비 자체가 수천 년 전부터 신화를 써오던 빛-어둠의 대비와 같이 보였기에. 그러니 실제 이름을 쓸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 아니, 이유와 별개로 더 나은 영화라는 결과물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영화는 - 매체는 어떤 지점에서 유토피아, 이상향 혹은 모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런 관점에서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러한 군인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 요즘 고민하는 직업윤리라는 관점에서도 보기에는 탁월했다. 정의감도 좋고 뭐 여러모로 그런데 - 권력 투쟁과 유물론적이 접근으로 이럴 수밖에 없었다 혹은 그 투쟁 과정 자체를 통하여 사람의 욕망을 비추는 것도 좋은 영화였겠지만. 비현실적인 선택들을 통하여 스러져가는 모습들. 실제 그 사람 하나하나 보다는 그 선택과 거기서 드러나는 태도 만으로 보이는 무언가.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럼 나는?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암살>의 마지막 파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이병헌의 내레이션이 있었던 <밀정>의 마지막이 없었다면 - 볼레로와 함께하는 폭파 씬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영화감독으로 김성수는 하나회 일당의 성공으로 영화를 끝맺었다. 그 이후에 승리라는 모습을 비출 수 있었음에도. 하지만 사람들은 자연히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올리고, 찾아보고는 있다. 영화는 끝났지만 영화 이후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으니까.


1천만이 보았다 - 는 앞으로도 더 반복 재생될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일반 상식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일 터이다. 다른 영화에 대비하여, 글쎄 <범죄도시>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통쾌함에 비해서 딱히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1,000만이 넘었다는 것도 참 비현실적이란 생각도 든다. 다른 게 뭐가 있나, 생각해 보면 <명량>이나 <한산> 이 가진 것, <극한직업> 과는 또 다른 무언가인데. 다른 영화도 있겠지만 우선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이 영화에 1,000만이나 딱 가는 것은 - 영화관이 너무 비싸다고 투덜대는 시대에도 가는 - 그 경험이 되려 스트레스를 높인다는 평이 있음에도 가는 게 꼭 황정민 배우의 열연을 보러 가는 것은 아닐 테니까.


문제가 하나 있다. 불의는 계속 살아남고, 정의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찾아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사카 코타로의 <피시 스토리>에 이러한 문장이 나오는데, 참으로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특히 통사적으로 보지 않고 단면을 바라보면 늘 그래왔다. 하지만 다양한 지성들이 지적하듯 우리가 수년, 수십 년 그리고 수백 년으로 늘려본다면 어떠할까. 그럼에도 남아있는 불의들이 있고, 그것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수 있겠지만 -그 지성들이 수십 수백 년, 천년으로 늘여놓은 스코프는 우리의 발전을 의미 있게 바라보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네 인생은 결국 고작 수십, 백 년을 채우지 못하는데.


그 와중에 다시 - 우리의 수명이라는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여러 기술들을 돌이켜보고 나면. 우리가 세기를 넘어서는 존재로 발돋움하는 어떤 지점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가지는 변화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의 봄을 지켜보던 세대가 나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이고 그들이 바라본 것과 나는 또 다를 테니까. 나의 시선 역시 나의 조카들과는 다를 터인데. 그렇기에 어떤 단면을 가능한 잘라서 보여주는 영화는 그 기능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긴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그것이 1,000만이 넘는 관객몰이를 할 수 있는 동력은... 잘 모르겠지만.


영화 이야기는 거의 없는 리뷰였기에, 몇 가지 더해보면.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딱히 어지럽진 않았다. 모든 연기가 좋았지만 황정민 씨는 도드라졌다. 어울리지 않게 잘생겨진 모두들에서도 개연성이 있었긴 한데, 사실 이태신 역의 정우성은 좀 튈 수 밖엔 없었다. 연기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잘생겼잖아. 그 외 장성들의 우왕좌왕은 조금 아쉽겐 한데, 영화의 길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영화가 가지고 가려는 주제는 그게 아니니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좀 애매하고.


김재규가 안기부로 갔다면 하는 것처럼. 육본이 자리를 지켰거나 뭐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 보안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수사를 하도록 했다면. 뭐 여러 가지 가정들. 서울역 회군이 없었다면 - 광주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면. 군정 이후의 여러 싸움들이... 올라가면 너무너무 많이 가게 된다. 그런 생각들이 계속 들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럼에도 이제 우리는 육사 앞에 흉상 철거에 관하여 군 안팎으로 토론을 할 수 있는 환경이긴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나라 여기저기에 있다는 것도 참 희한하지만, 뭐 세상이 원래 단면으로 보면 그런 거 아니겠나 싶고.


끝.

매거진의 이전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