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매일 글쓰기 (007/100)
8개월이면 야구 한 시즌이 시작되고, 끝날 시간. 새로운 신인이 등장하기도 하고, 과거의 전설이 돌아와 다시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이네요. 이 안에 누군가는 신인왕이 되고 누군가는 MVP 가 되고 누군가는 여전히 1군에 올라갈 수 있는지 의심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각자가 고교 야구 때는 리그를 씹어먹던 누군가들이지만, 프로의 세계는 다르다는 걸 체감하며 힘들어할 시기일 수 있겠네요. 갑자기 농구 이야기. 이 쪽에 전설적인 이야기 중에는 마이클 조던이 대학 농구 MVP 출신을 돌파하고 덩크를 성공시킨 다음 'Welcome to NBA'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뭐 아무래도 돈 주고 배우던 곳과 돈 받고 증명해야 하는 곳은 다르겠죠.
인턴이라는 과정은 저 신입의 과정을 먼저 체험해 보는 데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당장의 드래프트는 아니지만, 이 전체적인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다음, 나의 드래프트 차례에서, 그리고 나의 첫 타석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내는 과정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 투자하는 결정이 저는 나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충분한 경험이었는지는 제가 알 수 없네요, 경험은 개인의 것이니까요. 그래도 적어도 커피만 타라고 시키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몇몇 중요한 순간에 대타나 대주자로는 서게 하는 게 목표였다면, 목표였을까요. 사실 중요한 순간보다는 패배하는 경기에서 경험을 쌓게 해주는 차원의 투입일 순 있겠네요. 그래도 그 와중에 1군 선수들이 잠시 쉴 수 있고. 뭐 여러모로 비유가 계속 꼬이지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성장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방황할 때 지금도 잘 나가고 그때도 잘 나가던 친구가 그래서 1년 전의 너에 비해서 너는 지금 어떻니?라고 했을 때, 아 그래도 좀 바뀌긴 했지!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요? 지금은 최소 반년 단위로 쪼개도 아 꽤 다르구먼, 할 것 같네요. 사실 지난 회사를 꼭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심에는 이 질문,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서 딱히 답변할 게 없고. 달라진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 있었겠습니다. 아이고, 별 정보값이 없네요. 성장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는 가스라이팅들을 거둬내 보고. 다시, 성장을 해야 할까요. 적어도 프로 야구 스포츠의 신입 드래프트는 성장을 해야겠죠. 그러니 키움은 그럴 자신을 가지고 현역 1군 자원과 지명권을 트레이드했을 것입니다. 성장시킬 자신도 있고, 성장할 사람을 뽑아낼 수 있어서. 저도 그런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성장할 사람을 찾고, 성장시킬 자신이 1퍼센트 정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10% 정도 있네요. 드라마 <스토브 리그>에서 스카우터가 그런 말을 합니다. 1루까지 뛰는 속도가 4.5초 이내여야 하는데. 그런 선수들이 프로에 갈만한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웃이 되더라도 끝까지 빠르게 최선을 다해 뛰는 사람. 그래서 다음 타석에서 더 잘하려고 하는 사람이 프로에서 잘한다고요.
이야, 별 의미값이 없네요. 글쎄요, 성장, 어렵습니다. 키가 더 크기에는 늦었고. 나이는 자연스럽게 들어갈 테니 그건 성장이 아닐 겁니다. 성장에 대해서는 'movement'와 'progress'의 차이로 보는 게 제일 적합할 것 같아요. 움직임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주위의 환경이나, 내가 읽는 책, 어제 본 경기에 따라서 모든 게 시시각각 변합니다. 하루에 하는 생각의 가짓수가 수만 가지였다나, 그런 모든 것들이 나를 형성합니다. 세포의 재생성 관점으로 보면 -> 우리는 거의 1년만 지나면 테세우스의 배처럼 모든 세포들이 새로이 태어난 존재입니다. 변화는 했죠. 하지만 이게 성장인가요? 그렇지 않겠죠.
성장에는 방향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기준. 그 기준이 있을 때, 성장할 수 있고, 성장을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되고 싶나요? 1루수 거포가 꿈인 것과 중견수 리드오프가 되는 것인 전혀 다른 길입니다. 투수는 또 어떤가요? 유격수의 몸과 포수의 몸이 같을 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퇴사자 분은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일까요? 그게 무엇인지 알아야, 퇴사자가 성장했다, 혹은 아니다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알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의 행복은 무엇인가.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야구로 따지면 이대호를 보고 야구를 시작할 수도 있고, 이정후를 보고, 또 류현진을 보고 시작할 수도 있잖아요? 누구일까요? 아님 어떤 '제품'일까요? 무엇이 퇴사자 분이 생각하기에 멋진 모습이었을까요. 다시 - 그럼 솔직하게 무엇이 좋았다 나빴다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다음에 그 이유를 찾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함의 다른 면은. Skin in the Game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충~~ 판돈을 건 채로 판단해야! 이런, 투자 쪽 이야기인데. 이 책도 유명하고 읽어봄직 합니다. 각설, 그러니까 내 이해관계, 내가 잃을 수 있는 상태에서의 솔직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퇴사자 분은 돌아갈 곳이 있었다고 하지만, 다시 - 8개월은 신인왕과 프로를 떠나는 선수가 동시에 나올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퇴사자 분께도 당연히, 몹시도 귀중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퇴사자 분은 꽤나 하드 한 베팅을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몇 개월하고 나서 전혀 다른 곳에 갈 수도 있고. 아예 복학을 해버릴 수도 있고. 그럼에도 3개월로 시작해서 3개월, 그리고 또다시 2개월을 우리 회사에 벳팅 했습니다. 어쨌든 이것저것 맨날 뭔 소린지도 모르겠는 소리 하는 아저씨, 잔소리만 2시간씩 하는 사람이 있는 이 조직에 퇴사자 분의 인생의 8개월, 80년을 산다고 치면 0.83% 를. 20대가 가장 귀중하다는데 그렇게 보면 6.6% 를. 20대의 가치가 10억이라고 하면 6천6백만 수준이겠네요. 어떨까요, 가치 있었나요?
퇴사진단서를 오랜만에 쓰는데,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잘 나오고 있진 않습니다. 왜냐면 이게 '퇴사' 인지는 모르겠어서요. 퇴사로 진단하는 것은 우리와 동료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우리 혹은 떠나는 사람에게 귀인 해야 하는데 이건 약속된 순간이기도 하고, 환경의 영향도 있다 보니, 뭐랄까 더 진단하고 답변할 게 없다는 생각에 성장이니 뭐니 별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별히 슬프지도 않은 것 같고요.
왜 안 슬프냐면, 이제 퇴사할 분은, 다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그것이 필요함을 알고 있으니까요. 뭐 그래서 퇴사자 분이 더 성장한 모습이 되고, 우리도 스타트업으로 살아남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뭐 저만의 생각일 수는 있겠죠. 퇴사자 분이 다시는 스타트업에는 가지 않겠다! 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뭐 그렇진 않겠다고 맘대로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내가, 남은 사람으로 퇴사자의 매니저로 제가 더 해야 할 것은. 언젠가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퇴사자가 학교로 돌아간다는 안전장치를 생각했던 것처럼 , 퇴사자 분이 나중에 더 큰 도전을 - 신인 드래프트 -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곳으로 남아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바쁜 벌꿀이 슬퍼할 시간이 없다던데, 뭐 대충 그래요. JD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절벽 위의 호밀밭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절벽 한편에 파수꾼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청년을 그렸습니다. 대충 멋지게 말하는 척하려면, 저도 그런 마음이란 이야깁니다. 이번에는 우리 회사가, 우리 팀이 퇴사자 분의 안전망이 될 수 있도록 해봐야죠 뭐.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니 이건 퇴사 진단서가 아니라 졸업증명서이고, 졸업에 대한 축사입니다. 별 거 없고 프로세스도 없고. 노션 권한도 슬랙 권한도 잘 없는 이곳에서. 혼자서 궁리하고, 질문해 나가면서 주어진 일에 대해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하면서도, 한 발자국씩 꾸준히. 인생에 처음 경험하는 슬픔을 겪음에도 다시 회사로 나오고 다시 웃음을 되찾을 때까지. 꿋꿋하게 지낸 지난 8개월간의 퇴사자 분의 여정이 저는 감히 지난 수년간의 배움의 전당에서의 경험이 견줄 만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등교육법인지 대학설치법인지에 따라서 우리가 학위를 수여할 수는 없겠지만 - 그래도 졸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퇴사자 분에 대한 reference check을 해온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일을 해내려고 하는 사람이고, 팀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갈 만들어본 사람이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 졸업 증명에도 이렇게 써야겠죠.
귀하는 이 회사에서 지난 8개월간 꾸준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내었고, 그 과정을 팀원과 나누고 결과를 함께 축하할 줄 알았으며 그 결과 실제로 사업에 도움이 되는 결과물들을 만들어내었기에, 제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길의 초입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증명하였다고 판단함에 따라 아래와 같이 졸업을 증명합니다.
초고: 2024.06.30
수정고: 2024.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