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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Sep 30. 2024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다시) 매일 글쓰기 (008/100)

그제 유재석의 <핑계고>를 보면서, 든 생각. 유재석 씨가 말하길, 장난은 단 둘이 있을 때 하진 않는다고 했었다. 장난, 주체와 객체 외의 제 3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웃음을 만드는 사람으로 직업윤리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개개인은 꼭 그럴까? 별로 그렇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전 테헤란로의 디자인 벤치 중, 사람이 앉을 경우 시야가 가려지는 곳을 본 기억이 있다. 한 커플 중 여성분이 앉아보려고 하는 와중에, 앉자마자 남성분은 장난을 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려 했다. 약간 웃음이 나기도 하고, 왜 꼭 저럴까 싶기도 하고. 주변에 사람들은 충분히 있었지만 그들의 관객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행위를 하고,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서로 웃을 수 있겠거니, 싶었다.


행복을 되돌아봐서 느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현재에만 존재한다.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 사건은 발생하고, 사라진다. 물론, 과거의 기록을 통해 행복해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사진과 동영상, 글 속에서 발견하고 '지금 즐거운' 것을, 행위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무엇이 행복인지 정의함으로 행복에서 멀어질 수 있겠다만. 이 정도의 접근은 괜찮지 않을까?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무언가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우리는 미래를 상상하며 행복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는 로또를 사고, 그것이 확률적으로 발생 불가능한 사건임을 알면서도, 괜히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하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존재, 정체성은 꽤나 중요한 이야기다. 나는 무엇일까. 부족함에 몸서리치는 밤들을 세고, 이제야 남들에게 나름 떳떳한 이야기를 하나 가진 나는. 인류의 서사가 이야기라고 유발 하라리가 말했지만, 문명과 종족 아래의 나는, 이야기인가? <드래곤 라자> 에서 어느 아이가 죽은 밤, 후치 네드발은 요약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겠지" 우리는 이 정도.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었기에, 인도의 어떤 청년이 왜 날 태어나게 했냐고 소송을 건 해외토픽 기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웰-다잉의 개념과 안락사. 그리고 생전 장례식을 통해서 자리 잡게 되는 순간들도 기억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이벤트. 죽음을 정복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고. 죽기 싫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직은 우리는 그 결정된 사항을 바꿀 순 없었다. 그러니 종교 장사가 아직도 되는 것이겠지.


우리는 다만 살 수밖에 없다. '살다가'로 요약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문장 앞을 어떻게 꾸미는지가 우리의 선택이다. 사르트르가 선택이라고 말한 것이 어떤 맥락인지 나는 모른다.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리될 줄 알았지"라 적혀 있는데. 사실 우물쭈물은 한국의 신문사 혹은 다른 누군가의 덧붙임이라고 한다. 그는, 이만큼 살았으면 이럴 일이 날 줄 알고 있었지 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와전된 문장이 더 와닿긴 한다. 다만, 결론은 바꾸지 않는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지 않나. 불가능은 바보들의 사전에 있다고 나폴레옹이 말하면서 결단력 있게 살아서, 황제는 되었지만 불사가 된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삶이 바뀐다. 선택, 우물쭈물하지 않는다면 내릴 수 있다. 왜 우리는 우물쭈물하는가. 미래를 알 수 없고, 지금의 선택으로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내린 선택이 나를 만든다. 영어 속담에 습관을 만들면, 습관이 너를 만든다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선택이 나를 만들기에, 따라서 나의 정체성이란 나의 선택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를 규정짓는 나,라는 말은 가슴을 옥죄이는 기분을 생각마당 켜켜이 심어지는 느낌이 있다. 그럼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이 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선택은 관계이다. 나는 저 사람과 친구가 되고. 저 분야의 커리어를 걷기로 하고. 누군가와 사귀기도 헤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정의하기도, 그때 참 힘들었지라고 회상하며 결정짓는다. 나와 객체의 관계에서 나는 선택을 내리고, 나는 규정된다. 불교철학을 겉핥기로 보다가, '제법무아'라는 글귀가 나와 마음속에 담아 두는데. 나는 사실 없다. 모든 것은 관계이고 그 안의 내가 허브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성을 띄는 것은 아니다. 나는 유니크한 키값일 뿐이고, 그 안의 관계들로만 규정된다, 나라는 테이블은 무수한 관계성만이 기록될 뿐. 나와 국가의 관계, 나와 회사의 관계 모든 것은 관계이다.


그리고 언급했듯이,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도 나의 선택이고, 관계이다. 그리고 단순히 1:1 관계는 아니겠지.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고, 거기서 느끼는 신체적, 감정적인 부산물들이 있을 것이고. 그 모든 네트워크의 총체에 대해서 내가 선택한 결론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이고, 나의 정체성이다. 어떤 선택은 되돌릴 수 있다고,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말하면서, 의사결정을 위임하라고 하는데. 사실 관념의 영역에서 거짓이다. 모든 결정은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리는 것 자체도 새로운 결정이고. 지금 이 순간의 결정이 나를 규정짓는 것은 사실이다. 바뀔 수 있음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지금이다.


그렇기에 나는 쉽지 않지만 지금의 나를 좋아하고, 행복하다고 선택했다. 쉬운 건 딱히 없다. 예전에 비해 팍팍하다. 망하면 고향 내려가지 뭐. 편의점 알바라도 할 순 있으니까, 몸만 신경 쓰자. 이런 걸 넘어서서,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하기 싫었던 일들도 웃으며 해야 한다. 길을 걸으면서 억지로 웃는 연습을 하고, 회사에서는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린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기 때문에, 낙원은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되뇌며. 지금 너와의 관계와 너를 둘러싼 다른 관계를 더 낫게, 행복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끔은 내가 아닌 무언가가 선택을 하는 것 같은 때가 있다. 여러 가지 선들에 짓눌려, 혹은 팻-핑거처럼. 감정에 휩싸이고, 흔들리는 때도 없지 않다. 그것이 꼭 나쁘다고 말할 필욘 없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나는 행복해야 하고, 내가 행복함으로, 너의 존재에 연결된 나라는 노드가 행복이라는 관계로 규정지어질 때. 네가 더 행복하고, 순간의 즐거움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부정적인 소식이 들려올수록. 수렵과 채집, 집을 짓기 전의 사람들의 습성으로 사람들은 주의력을 모두 부정적인 것에 쓴다고 했다. 아마 너와 나, 우리 모두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그전에. 그러한 세상 속에서도 관계를 지키고, 행복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이다.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소중한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서. 나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부정적인 관계들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기로 결정한 단 하나의 관계, 선을 위해.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기로 선택했다. 약간의 근육통. 잠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은 부분, 앞으로 일어날 부정적인 상황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럼에도 난 나를 행복하다고 선택했고, 너와의 관계가 행복하다고 선택하겠다. 그렇게 우물쭈물하지 않고, 비록 요약되더라도, "태어나서, 즐겁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었다"가 될 수 있도록. 지금의 나와, 너의 관계를 지켜내고 웃음을 짓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그게 나의 정체성이 될 때까지.


초고: 2023.09.18

수정고: 202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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