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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Nov 07. 2016

<포레스트 검프> by 로버트 저메키스

이런 태도로 삶을 대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케이블 등에서 단편적으로만 보았던 포레스트 검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로 결심했다. 영화 <국제시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시절 슬로우뉴스에 게재된 이 글 이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추가로, 뭔가 심적으로 안정을 얻고 싶은 시간이 있었기에, 초콜릿 박스를 꺼낼 때가 되었다며, 넷플릭스를 켰다. 

(주: 위키를 뒤지다 보니 '16.09 에 메가박스 재개봉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뭔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양이의 목숨은 9개라는 서양 민담과 합친 짤... 


처음 리뷰를 쓸 때는 제니와 포레스트를 통해 미국 사회의 명암을 드러내는 영화이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서 뭔가 그럴듯한 리뷰어 코스프레를 하려고 했지만 나무위키 에 등재된 걸 보니 이미 다들 이야기하고 지나간 것 같아서 그 부분은 과감히 패스. 


그러고 나니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집에 가고 싶어요


자이언티의 <꺼내먹어요> 노래 가사가 기억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tK028Q07Vg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꺼야

포레스트는 제니가 떠나고 3년이 넘도록 뛴다. 어떤 면에서는 <허니와 클로버>에서 주인공의 자전거 여행을 연상케 한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은 졸업 작품을 때려치우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지도 못하고, 취업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그저 자전거 페달을 밟아 여행을 시작한다. (물론 이 친구는 가난한 대학생이고, 작중 검프는 떼부자이다...)


왜 떠났는가는 대충 알 것 같다. 그러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나? 떠나고 싶은 순간들. 포레스트가, 처음에 뛰다가 보철장치가 부서질 만큼 달아나던 때 같은 해방감. 혹은, 그냥 지금, 여기가 싫어서. 그냥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있다 보면 마냥 타고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할 때가 있지 않나?(내 경우엔 그게 서울 2호선인 경우가 많아서 별로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왜 돌아오는가. 무엇을 얻고, 뜀박질을 멈췄을까. 잘 모르겠다. 상술한 <허니와 클로버>의 주인공은 무언가 해내었다는 감정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포레스트는? 내레이션으로 말해준다. 그냥, 지쳤다고.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나는 그 기분을 도무지 모르겠다. 포레스트는 분명하게 말했다. 바보라고,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나의 얕은 짐작으로 그는 어쩌면 범인보다 더 많은 감정적인 자극을 받는 사람일 수도 있다. 영화적 과장을 더해 3년이라고 한 것을 제외하고(소설 원작이지만 사실), 그냥 그 순간이 궁금해졌다. 왜 우리는 어느 순간 집으로 가고 싶어 지는가, 돌아 가는가. 


집에 갑시다 여러분, 집에!





바보에게 바보가


박명수의 노래가 떠올랐다. 뭐, 여자 주인공인 제니도 바보라고 하면 바보 아니겠는가. 그 격량을 그렇게 밖에 못 헤친 것은 사회의 문제도 있겠지만... 왜 그럼 떠났단 말인가, 포레스트를. 그 마지막 순간에. 아마 그녀는 무서웠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은 포레스트의 사랑을 믿지 못했다거나. 그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아마 지금의 본인이 너무 싫어서... 


두 바보가 있다. 정식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어머니가 교장과 섬싱을 일으켜야 할 정도로 IQ가 낮은 사람. 그리고 한 사람은 너무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다 보니, 망가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방황하던 한 사람. 둘의 삶을 대비하여 보여주는 것이 보수 반동이라고 말한다면, 뭐 그것도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그냥 그 둘이 모두 안쓰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 행복할 것 같은 순간에 포레스트가 찾던 것은 제니였고, 그 암흑 같은 곳에서 제니를 꺼내 줄 사람은 포레스트였는데 그토록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엇갈리거나 혹은 떠나거나. 그냥 그렇게만 지나간 시간들이 아까워 죽을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한쪽 바보가 다른 바보에게 해 준 말이 영화 전반에 걸쳐 계속 나오는, 그리고 다른 작품이나 짤방으로(meme) 복제, 증식하는 마법의 단어. 'Rnn Forest Run'이다. 어쩌면 그 단어가 3년간 포레스트가 뛰어만 했던 이유일 까도 생각해봤다. 


요즘은 Run Berry Run 이라고...아 아닙니다.(feat. 플래시)



처음 소녀가 소년에게 달리라고 했을 때에는, 그 안 좋은 곳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포레스트는 계속 달렸다. 그리고 안 좋은 곳을 떠나 좋은 곳으로만 향해 갔다. 하지만 정작 소녀는 달리지 못하고 계속 더 안 좋은 곳으로만 빠져 들어갔다.


포레스트에게 가장 안 좋은 상황을 타개한 방법은 달리는 것뿐이었다. 그가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가 그걸 멈춘 것은 뭘까, 고민하게 되었다. 지쳤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의 제니에 대한 사랑은 3년간의 뜀박질을 만들어낼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 전의 포레스트는 제니에게 더 다가가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 것 같다. 아니, 사실 달리기도 마찬가지고 끝까지 그는 제니의 부름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이런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니. 그러한 사랑 앞에서 3년간의 달리기가 무슨 소용이랴. 그러니, 여전히 왜 그가 3년 만에 피곤해졌는지, 집에 가고파 졌는지가 궁금해졌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그는 제니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그는 바보가 확실하다. 그의 재력과 그의 친구와 함께 하면 제니를 찾는 게, 지금 만큼 쉽지는 않아도 가능한 부분이 있었을 것인데. 그는 그저 달렸을 뿐이다. 



나도 똑똑하진 않으니까


사실하고 싶은 말은 몽땅 이 문단에 담겨 있을 것 같다. 처음으로 <포레스트 검프>를 처음부터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뭐 얼마나 똑똑하다고. 믿을 수 없는 운과,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포레스트가 부러운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스스로가 'I'm not smart, but...'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빛나고 아름다워 보였다. 



뭐, 그래도 변명을 하나 더 하자면. 사람 간의 문제 앞에 똑똑한 사람은 몇 없고, 그리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분히. 물론 비즈니스 관계에 있어서 서로의 실리를 따지는 것도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보같이 사람을 믿고, 기다릴 수 있는 태도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태도만 가지고 살면, 우리에겐 포레스트에게 주어졌던 것 같은 엄청난 운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바보 같이만 살 순 없다. 3년간 달릴 체력도 없고(...) 하지만 적어도 극소수의 사람에게만이라도 우리는 좀 바보 같아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이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2016.11.07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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