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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May 27. 2017

<이웃집 토토로> by 미야자키 하야오

해피 엔딩을 좋아합니다.

해피 엔딩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오랫동안 지냈다고 말하는 거짓말을 사랑합니다.





 나는 현실을 싫어하는 편이다. 


 개인으로는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다. 미련과 후회가 넘쳐나지만, 당장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삶에서 우울함과 쓸쓸함을 마주하는 태도를 세웠다. 그리고 나선, 뭐 슬프면 슬픈 대로 즐겁다. 사랑한 만큼 차여서 힘들 때도 웃을 수 있었고, 간절히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해도 나는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픈 건 싫고,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과는 좀 다르게,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조금 시야를 넓혀보면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넘쳐 난다. 왜 사람들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체계 속에 갇혀 있는가. 왜 착취의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가? 기술의 충분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굶어 죽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것밖에 안 되는 종인가. 우리는 나의 범위를 이렇게까지 밖에 확장하지 못하는 것인가. 다름을 인정할 여유가 없이 수십여 년을 살다 가는 미물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는 진화할 수 있을까. 

 물론 시계를 십수 년, 백여 년 돌려서 비교를 해 보자면 우리는 계속 더 나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 속도는 그대로인데,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시야는 너무도 늘어났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노예로 삼는 것이 잘못되었다를 넘어서서, 개개인의 꿈과 희망을 돌이켜볼 수 있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그것을 모두 감내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고, 우리 스스로도 서로를 그렇게까지 받아들일 수 있질 않다. 



 그래서 나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의 행복을 갈망한다. 


 현실에 대한 개인의 판단과 별개로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영역은 '해피엔딩'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위치가 정해진 유토피아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의 행복을 위해 가야 할 곳을 정하는 것은, 그것을 상상하고, 그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금 지구 상에서 살아남고, 번성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내일. 한치 라도 더 앞으로 가려는 노력은 그래서 언제나 중요하다. 물론, 그러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진보가 가져온 끔찍한 결과들도 있다. 부작용도 항상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우리 종족이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희망고문'이라는 유령이 떠돌 때는 조금 고민이 되긴 했었다. 앞으로의 전망을 가지고 현실을 착취하는 것 역시도 지금의 세상이 동화 속 세상이 아니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라는 분석에 공감이 갔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를 계속해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계속 다크 판타지에 열광하다가도 다시, - 오리지널 판타지를 찾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고 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는 일본의 미화된 전통, 페미니즘, 자연에 대한 경배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몇몇은 나와 그 생각의 결이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서사는 나를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주인공들이 있기도 했고, 그럴 수 있는 동화적, 신화적 존재를 그려나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웃집 토토로는 숲의 신령으로 보이는 존재가, 우는 아이를 달래주는 이야기이다. 우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었다. <닥터 후> 뉴 시즌 5의 에피소드 2를 떠올렸다. 순수한 소망을 가진 아이들을 지켜주는 신적인 존재. 


 사실, 이웃집 토토로의 서사에서 큰 갈등 요소는 병에 걸린 어머니가 집을 올 수 없을 때, 메이의 때 이른 방황 정도 밖에는 없다. 평화로운 세상에 가깝겠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오는 격렬한 갈등이 없는 세상에서 토토로의 역할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는 아이를 위해 나서는 모습에서 나는 살짝 눈시울을 붉혔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까. 나 스스로가 우는 아이를 위해 나서 줄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어쩌면 일종의 메시아 콤플렉스의 일종이 아닐까 경계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토토로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튼의 방황하는 시절에서 나는 한 치도 앞으로 나서지 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호밀밭에서 절벽으로 달려 나가는 아이들을 붙잡고 싶은 모양이다, 란 생각이 들었다.  


 잔인해지지도, 비겁해지지도 않고,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으며, 더 나는 미래에 베팅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게 토토로 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내 모습이 떠올라서 살짝 눈시울을 붉혔던 것 같다.

 토토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다. <스타워즈>의 R2-D2처럼,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을 해결하는 장치이다. 그리고 순수한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될 수도, 되고 싶은 생각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세상에 모든 길 잃은 아이에게 집을 찾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속물적인 욕망과 뒤섞인 이런 야망들은 밤마다 복잡한 머릿속을 만들어주었고, 그때마다 괴로워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웃집 토토로의 세계도, 토토로도 이 세계가 그리고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형태의 무언가 일 뿐이다.



산타는 있다고 말하는 거짓말을, 

지켜내기 위해 긴 줄을 서서 장난감을 사고,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서 살짝 놓아두는, 

아침에 놀란 아이에게 

우와 정말 산타는 있었구나 라고 다시 거짓말하는,

모두가 바라지만,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을 

거짓말이 아니게 만들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이게 만들어보고 싶다.


초고: 2016년 6월 26일

탈고: 2017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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