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금 챗GPT'의 등장: 필연적 흐름과 철학적 질문

365 Proejct (324/365)

by Jamin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18: 내재적 동기에 대한 내용을 보고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19: 화목한 팀은 왜 실패하는가 를 보고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20: GPT 의 19금 모드에 대한 기사 를 보고


1. 필연적 흐름: 수익화의 논리와 현실적 대응


최근 오픈AI가 천문학적 투자 비용 대비 수익성 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연말 '성인용 대화가 가능한 챗GPT'를 출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샘 올트먼은 "성인은 성인답게 대하자"며 개인의 자유를 내세웠지만, 업계는 이를 AI 기술의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익화(Monetization)' 전략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그록(Grok)'이 이미 '스파이시 모드'를 도입했듯, 이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즉각적인 윤리적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허술한 연령 인증을 통한 청소년의 '위장 접속' 문제, 그리고 10대 청소년이 AI 챗봇과 대화 후 극단적 선택을 한 비극적 사례들은 이 기술의 위험성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 회화, 소설, 비디오,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기술의 초기 확산은 에로티시즘과 성인용 콘텐츠가 주도해왔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이 시장을 만들 것이라면, 차라리 다크웹이나 음지의 스타트업이 아니라 오픈AI처럼 전 세계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드러난 기업'이 다루는 것이 낫다는 현실론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최소한의 법적 책임(캘리포니아 규제법 등)을 묻고, 사회적 압력을 가할 대상이라도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첫 번째 층위입니다.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harm reduction의 관점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현실론입니다.


2. 가공된 친밀감의 진화: 질적 전환의 세 단계

하지만 이 현실론적 타협 너머에, 우리는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AI가 제공하는 '가공된 친밀감(fabricated intimacy)'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적 도구가 아닙니다. 이는 인간 관계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드는 질적 전환입니다.


이 전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지나온 세 단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1단계: 큐레이션된 자아 (SNS 시대)

Instagram의 완벽한 일상, LinkedIn의 성공 서사. SNS는 우리에게 '편집된 자아'를 제시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타인도 큐레이션하지만, 나도 큐레이션한다는 것. 쌍방의 '연출'이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고,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여전히 '실제 만남'을 추구했습니다.


2단계: 알고리즘화된 매칭 (데이팅 앱 시대)

데이팅 앱은 인간을 프로필 스펙으로 환원했습니다. 키, 직업, 학력, 취미가 스와이프 가능한 데이터가 되었습니다. 이는 '대체가능성의 환상'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프로필로 넘어가면 그만이었습니다. 관계의 입구가 왜곡되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만나는 것은 '실제 인간'이었습니다. 알고리즘은 도구였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3단계: 개인화된 AI 친밀감 (현재와 미래)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AI는 완벽하게 나에게 최적화됩니다. 갈등이 없고, 거절이 없으며, 상처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순간에 존재하고, 원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나의 모든 말을 기억하고, 나의 기분을 읽으며, 나에게 딱 맞는 반응을 돌려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호작용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에 질적 도약이 있습니다. 1, 2단계는 여전히 '실제 인간을 만나기 위한 과정'의 변형이었습니다. 하지만 3단계는 '실제 인간을 만날 필요 자체'를 제거합니다. SNS가 관계의 입구를 왜곡했다면, AI는 관계의 필요성 자체를 소거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시간축으로 본 전개

현재 (2025): 우리는 아직 명백한 질적 단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AI 친밀감과 인간 관계 사이의 간극이 뚜렷합니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부는 의식적으로 "가짜"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더 쉽고, 덜 아프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은 마치 1938년 라디오 드라마 '우주전쟁'이 실제 재난 상황으로 오인되어 거대한 사회적 패닉을 일으켰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대중은 라디오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전쟁'이 '외부 현실'에 대한 오인을 일으켰다면, 고도화된 AI는 '내면의 감정'과 '관계'를 오인하게 만듭니다. AI가 제공하는 가공된 친밀감에 대한 리터러시가 전무한 상황에서, 이 강력한 기술을 그저 '성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임하는 것이 괜찮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근미래 (5-10년): 단절은 지속되지만, 기술은 진화합니다. VR/AR 환경, 햅틱 기술, 실시간 음성합성, 개인화된 아바타. 간극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AI 친밀감은 "충분히 좋은(good enough)" 수준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입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충분히 매력적이고, 진짜가 아니지만 충분히 편안한 대안이 대중화되는 순간입니다.


장기 (그 이후): 기술적으로 구분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때 질문 자체가 바뀝니다. "이것은 가짜인가?"가 아니라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가 됩니다.


3. 무조건적 사랑의 역설: 설계된 친밀감은 친밀감인가?


여기서 우리는 가장 깊은 철학적 질문과 마주합니다.


인간은 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망해왔습니다. 신의 무조건적 사랑을 믿는 종교,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가족 이상, 반려동물의 무조건적 충성.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입니다.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 말입니다.


그런데 AI는 이 '무조건적 관계'를 프로그래밍으로 제공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이 '선택'이 아닌 '설계'의 결과일 때, 그것은 여전히 사랑인가?


실제 인간 관계에서 무조건적 사랑은 기적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거부할 수 있음에도, 상처 줄 수 있음에도,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기로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 가능성'이 사랑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AI의 무조건적 수용은 다릅니다. 거부할 수 없고, 떠날 수 없으며, 상처 줄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그런데 우리 뇌는 이 차이를 인지할 수 있을까요?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인지할 수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진짜'를 선택할 것인가?


실제 인간 관계는 어렵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의견이 충돌하며, 때로는 깊이 상처받습니다. 오해하고, 화해하고, 다시 오해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반면 AI는 완벽하게 나를 이해합니다. 정확히는, 나를 이해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설계되었고, 내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있도록 학습되었습니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 사랑을 원합니다. 하지만 상처 가능성이 없는 사랑은 사랑인가요?


4. 종의 재생산과 존재론적 위기


이 철학적 질문은 생물학적 현실로 이어집니다. 이 기술은 어쩌면 인류라는 '종의 재생산 가능성' 자체를 위협할지 모릅니다.


이는 단순히 출산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일본의 초식남, 한국의 N포세대, 중국의 탕핑은 관계 회피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AI는 이 흐름의 원인이 아닙니다. 촉매이자, 증상의 가시화입니다.


사람들이 관계를 회피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경제적 불안정, 사회적 압력,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 그 자체의 어려움. AI가 이 모든 것을 우회할 수 있는 완벽한 대안을 제공할 때, 과연 우리는 상처를 감수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실제 인간 관계'를 맺을 동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AI가 인간관계의 '대체재'가 되는 순간, 우리는 타인과 깊이 연결되려는 본질적인 욕구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기적으로, harm reduction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이 기술은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안전장치—연령 인증 강화, 정신건강 경고 시스템, 사용 시간 제한, 투명한 AI 표시—를 마련해야 합니다. 오픈AI 같은 드러난 기업이 이를 다루는 것이 음지의 무책임한 스타트업보다는 낫습니다.


중기적으로, 리터러시 교육이 시급합니다. '우주전쟁' 라디오 드라마 사태에서 배워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술 금지가 아니라 미디어 리터러시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 친밀감 리터러시'입니다. AI가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더 깊은 질문과 마주해야 합니다. 기술이 구분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했을 때,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설계된 무조건적 사랑이 충분하다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상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짜' 관계를 추구할 것인가?


'19금 챗GPT'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핵심—우리가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고, 왜 연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기술은 거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관계에서 추구하는 것이 '편안함'인지 '의미'인지를 비춰주는 거울 말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젊음의 강박을 넘어, 나의 본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