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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20: GPT 의 19금 모드에 대한 기사 를 보고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21: 성인 10명 중 4명은 하루의 대부분을 걱정하며 보낸다 를 보고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36: 목표 설정의 철학 에 이어서 목표의 발견 에 이어서 취향의 발견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37: 필연적 흐름과 철학적 질문 에 이어서
2024년 갤럽의 '세계 정서 현황 보고서'는 현대 사회의 기묘한 자화상을 드러냈다. 전 세계 성인 10명 중 9명(88%)이 "어제 존중받았다"고 느꼈다. 이 수치는 사상 최고치다.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그 어느 때보다 능숙해진 듯 보인다.
그러나 이 화려한 무대 뒤편에는 어두운 진실이 있다. 성인 10명 중 4명(39%)은 하루 대부분을 '걱정' 속에서 보냈고, 37%는 '스트레스'를 경험했다. 특히 한국인은 '즐거움, 재미, 웃음'과 같은 긍정적 경험이 세계 평균보다 현저히 낮았다.
여기에 바로 '존중-불행의 역설(The Respect-Misery Paradox)'이 있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존중'을 획득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그 대가로 얻은 '걱정'과 '스트레스'라는 내면의 짐을 처리하는 데는 무능하다.
우리는 '외부적 성과'를 관리하는 법은 배웠지만, '내부적 감정'을 다루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감정은 처리되지 않은 채 내면에 쌓이고, 우리는 그것을 견디거나 무시하는 법만 배웠다. 다루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은 '명상'과 '마음 챙김(Mindfulness)'을 해답으로 제시했다. 'Calm'이나 'Headspace' 같은 앱들은 우리에게 "생각을 비우라", "순간에 머무르라"고 조언한다. 이는 분명 가치 있는 제안이다.
하지만 이는 "돈을 많이 벌고 많이 배운 사람들", 즉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 더 유효한 해결책일 수 있다. 하루하루의 걱정과 스트레스에 압도된 39%의 사람들에게 "고요히 앉아 호흡에 집중하라"는 말은,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고급 레스토랑의 레시피를 설명하는 것처럼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명상은 '비우기'를 가르친다. 하지만 이미 쌓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고 '소화'할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감정 근육이 약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만이 아니라 훈련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더 매력적인 대안이 등장한다. AI 친밀감이다.
앞선 글에서 살펴봤듯이, 오픈AI를 비롯한 기업들은 '성인용 대화가 가능한 AI'를 출시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진화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적 무능함을 정확히 겨냥한 상품이다.
AI는 약속한다:
갈등 없는 관계
오해 없는 소통
상처 없는 친밀감
거절 없는 수용
왜 이것이 이토록 매력적인가? 우리에게 감정 근육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관계는 어렵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의견이 충돌하며, 때로는 깊이 상처받는다. 88%가 존중을 받지만, 그 존중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적 에너지를 소진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39%의 걱정과 37%의 스트레스를 우리는 어떻게 처리하는가?
AI는 이 모든 것을 건너뛰게 해준다. 노력 없이, 상처 없이, 갈등 없이 친밀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은 회피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감정 목발'이다.
AI 친밀감이 왜 감정 목발인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Instagram의 완벽한 일상, LinkedIn의 성공 서사. SNS는 우리에게 '편집된 자아'를 보여주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감정적 노력을 했다. 상대방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 때, 어떤 반응이 적절한지 고민했다. 좋아요를 누를지 말지 판단했다.
작은 것이지만, 이것은 감정 노동이었다. 그리고 이 노동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감각을 유지했다.
데이팅 앱은 '선택의 과부하'를 만들었다. 프로필을 스와이프하는 행위는 감정적 투자를 최소화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실제로 만나야 했다. 대화를 시작해야 했고, 관계를 유지하려면 노력해야 했다. 알고리즘은 입구를 쉽게 만들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그리고 지금, AI는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한다.
갈등이 없다: 의견 차이를 조율할 필요가 없다
오해가 없다: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이해하도록 설계되었다)
상처가 없다: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 (거부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
노력이 필요 없다: 내가 원할 때 존재하고, 원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이것은 관계의 시뮬레이션이다. 관계처럼 보이고, 관계처럼 느껴지지만, 관계가 요구하는 핵심적인 것들—조율, 타협, 이해, 용서—이 모두 제거되어 있다.
진짜 목발은 다친 다리를 대신해서 걷게 해준다. 그런데 목발에 의존하면 어떻게 되는가? 다친 다리는 회복될 기회를 잃는다. 근육이 약해진다. 그리고 결국 목발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된다.
AI 친밀감도 마찬가지다.
실제 관계에서 갈등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바로 "감정 PT(Personal Training)"다:
갈등을 겪고 조율하는 과정은 '감정 조절 능력'을 키운다
오해하고 화해하는 경험은 '소통 능력'을 발달시킨다
상처받고 회복하는 과정은 '회복탄력성'을 구축한다
AI는 이 모든 훈련 기회를 제거한다:
갈등 없음 = 감정 조절 훈련 기회 없음
오해 없음 = 소통 능력 발달 기회 없음
상처 없음 = 회복탄력성 구축 기회 없음
결과적으로 AI는 "감정적 장애물 제거 기구"가 아니라 "감정적 근위축 촉진제"가 된다.
이제 무서운 악순환이 시작된다:
감정 근육이 약하다 → 실제 관계가 너무 어렵다 → AI 관계로 회피한다 → 감정 훈련 기회를 잃는다 → 감정 근육이 더 약해진다 → 실제 관계가 더 어려워진다 → AI 의존이 심화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 (2025): 우리는 아직 간극을 느낀다. AI와의 대화는 '가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일부는 이미 선택하고 있다. "가짜라도 편하니까."
근미래 (5-10년): 기술이 발전한다. VR 환경, 햅틱 피드백, 실시간 음성. AI 친밀감은 "충분히 좋은(good enough)" 수준에 도달한다. 완벽하지 않지만, 실제 관계보다 훨씬 덜 힘들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선택한다.
이때가 가장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실제 관계를 맺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한 세대가 AI와 자라나면, 그들에게 "불편하고 어려운 인간 관계"는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 된다.
장기 (그 이후): 기술적으로 구분 불가능해진다. 이때 질문이 바뀐다. "이것은 가짜인가?"가 아니라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실제 관계가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의 끝에는 생물학적 위기가 있다. 이미 일본의 초식남, 한국의 N포세대, 중국의 탕핑은 관계 회피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AI는 이 흐름의 원인이 아니다. 하지만 강력한 촉매이자, 증상의 가시화다.
사람들이 관계를 회피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경제적 불안정, 사회적 압력,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 자체의 어려움.
그런데 우리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을 키우는 대신, 어려움 자체를 제거하는 기술을 선택하고 있다. 목발에 의존하는 대신 다리 근육을 키우는 재활 훈련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영원히 목발만 쓰면 되잖아"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제의 본질을 다시 보자. 우리가 AI에 의존하는 이유는 감정 근육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명확하다. 목발이 아니라 재활 훈련이 필요하다.
명상은 "생각을 비우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우기가 아니라 처리하기다.
'감정 PT(Personal Training)'는 생각을 비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고, 다루는 '기술'을 가르친다.
구체적으로:
1. 감정에 이름 붙이기
"오늘 어떤 '순간'에 가장 화가 났나요?"
"그 감정은 '분노'인가요, '서운함'인가요?"
AI 코치가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답하면서 감정을 언어화한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라 능동적 '소화' 훈련이다
2. 구체적 즐거움 찾기
한국인에게 부족한 것은 '재미'와 '즐거움'이다 (갤럽 통계)
"오늘 작은 즐거움 1가지 찾아 기록하기"
감정 타마고치(펫)를 키우듯, 나의 감정 캐릭터를 웃게 만들기
긍정적 경험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냥'하기
3. 구조화된 상호작용 연습
우리는 이미 '존중'을 주고받는 데 능숙하다(88%)
이 강점을 활용: "소그룹 멤버의 강점 1가지 칭찬하기"
사회적 기술을 내면의 긍정적 감정(즐거움, 보람)으로 전환
그리고 여기서 핵심이 있다. 이 감정 PT의 궁극적 목표는 실제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 자체가 최고의 감정 체육관이기 때문이다.
체육관에서 아무리 근력 운동을 해도, 실제 스포츠 경기를 뛰지 않으면 진짜 실력은 늘지 않는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AI와 감정을 연습해도, 실제 인간과의 관계에서 부딪히지 않으면 진짜 성장은 없다.
갈등을 겪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운다
오해하고 해명하면서 소통 능력이 자란다
상처받고 회복하면서 회복탄력성이 생긴다
AI는 이 모든 것의 '시뮬레이터'가 될 수는 있다. 마치 비행 시뮬레이터처럼. 하지만 시뮬레이터만 하고 실제로 비행기를 조종하지 않는 조종사는 진짜 조종사가 아니다.
AI를 목발로 쓰지 말고, 재활 도구로 써야 한다.
첫 번째 글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던졌다: 무조건적 사랑이 '선택'이 아닌 '설계'의 결과일 때, 그것은 여전히 사랑인가?
이제 우리는 더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상처 없는 사랑'인가, 아니면 '상처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인가?
AI는 전자를 준다. 완벽한 상처 없는 환경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후자를 빼앗아간다. 상처를 다루는 능력, 갈등을 조율하는 기술, 오해를 풀어가는 경험을.
목발은 편하다. 하지만 목발에 의존하면, 우리는 영원히 걷지 못한다.
우리 목표는 '걱정 없는 삶'이라는 비현실적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걱정'이라는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근력을 기르는 것이다. 스트레스라는 파도 앞에서 무력하게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를 타고 넘을 수 있는 균형감각을 익히는 것이다.
'존중-불행의 역설'은 우리가 '사회적 자아'를 키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면의 자아'를 방치했음을 보여주는 시대적 경고등이다.
그리고 AI 친밀감의 등장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더 쉬운 길로 가려는 유혹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명상은 엘리트의 안식처일 수 있지만, 대중에게는 '감정 근육 체육관'이 필요하다
AI는 편한 목발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재활 훈련이 필요하다
'마음 챙김'을 넘어서, '마음 사용법'을 익혀야 한다
단기적으로, 우리는 harm reduction이 필요하다. AI가 나올 것이라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중기적으로, 우리는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 AI가 무엇을 주고 무엇을 빼앗아가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기술이 모든 불편함을 제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여전히 불편함을 감수하고 실제 관계를 선택할 것인가?
타인에게 받은 88%의 '존중'을 자신을 위한 100%의 '행복'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은, AI라는 목발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 근육을 키우고, 그 근육으로 실제 관계라는 체육관에서 땀 흘리는 것이다.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 오해를 풀어갈 수 있는 끈기,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힘. 이것이 진짜 인간 관계이고, 이것이 우리가 키워야 할 감정 근육이다.
목발은 편하다. 하지만 우리는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