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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목적성과 삶의 긍정

365 Proejct (326/365)

by 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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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을 묻다:

합목적성에서 '삶 자체'의 긍정까지


우리는 종종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의 저변에는 '합목적성(合目的性)'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합목적성이란 일정한 목적에 들어맞는 성질을 의미하며, 세상의 모든 존재가 어떤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설계되었다는 관점, 즉 목적론을 전제합니다.


이 글은 '합목적성'이라는 익숙한 개념에서 출발해,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목적 없는 삶은 어떻게 가치 있을 수 있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1. '합목적성'이라는 익숙한 안경


합목적성은 세상을 이해하는 강력하고 직관적인 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물의 '목적인(目的因)'을 탐구했듯, 우리는 "새의 날개는 날기 위해 존재한다"고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이 관점은 사회와 행정에서도 발견됩니다. '합법성'이 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라면, '합목적성'은 "왜 그 법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 즉 공익 실현이라는 궁극적 목적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념입니다. 법의 빈틈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법의 '목적'에 비추어 판단합니다.


이처럼 합목적성은 우리의 삶과 세계가 어떤 의미 있는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안정감을 줍니다.


2. '목적'이라는 낡은 감옥: 니체와 들뢰즈의 비판


하지만 근대 철학, 특히 니체와 들뢰즈는 이 '합목적성'이 오히려 삶을 억압하는 낡은 개념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니체(Nietzsche)에게 합목적성은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무너져야 할 허상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고통과 허무를 견디기 위해 신, 천국, 진리 같은 '저 너머의 목적'을 발명했습니다. 니체는 이것이 '지금, 여기'의 생생한 삶을 부정하고 평가절하하는 '노예의 도덕'이자 허무주의라고 보았습니다. "진짜 삶은 천국에 있다"고 믿는 순간, 지금의 삶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Deleuze)는 목적론적 사유를 하나의 뿌리에서 정해진 목적을 향해 자라는 '나무(Arbre)'에 비유했습니다. 반면 그는 시작도 끝도 중심도 없이 예측 불가능하게 접속하고 뻗어 나가는 '리좀(Rhizome, 뿌리줄기)'이야말로 삶의 참모습이라고 말합니다. 합목적성은 리좀처럼 창조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삶의 잠재력을 '하나의 목적'이라는 틀에 가두는 폭력입니다.


이들에게 "존재의 목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왜 감옥에 갇혀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3. 목적 없이, 어떻게 가치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할까요? 니체와 들뢰즈는 정반대로 답합니다. "목적이 없기에,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가치가 있다."


삶의 가치는 삶 바깥(초월)이 아니라 삶 안(내재)에 있습니다.


니체의 대답: 아모르 파티(Amor Fati)


삶이 그 자체로 가치 있음을 증명하는 태도가 바로 '운명애(Amor Fati)'입니다. 이는 삶의 고통, 환희, 비극 그 어떤 것도 빼놓지 않고 "이것이 나의 삶이다"라고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사상, 즉 "지금 이 삶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면 받아들이겠는가?"라는 질문은 이 긍정의 최고 시험대입니다. 이 질문에 "다시 한번!"이라고 외칠 수 있을 때, 삶은 어떤 외부 목적도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됩니다.


들뢰즈의 대답: 생성(Becoming)


삶의 가치는 '어떤 목적을 이룬 상태(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생성)'에 있습니다. 삶은 정해진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리좀처럼 다양한 접속을 실험하고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과정 그 자체로 가치 있습니다.


4. 그러나 삶은 고통스럽다: '초인'과 '천명'의 재해석


여기서 가장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됩니다. "삶은 그 자체로 고귀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고통스럽다." 모두가 니체가 말한 '초인(Übermensch)'이 될 수 있을까요? '소명(Calling)'이나 '천명(天命)' 같은 이야기는 이제 정말 의미 없는 것일까요?


첫째, 삶이 고귀한 이유는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워서'입니다.


니체가 말한 고귀함은 삶의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삶이 쉽다면 '긍정'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삶이 지옥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하거나 원망하는 '노예의 태도'를 극복(Über-)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라고 말하는 '태도' 자체가 고귀한 것입니다.


둘째, '초인'은 완성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모두가 초인이 될 필요도, 될 수도 없습니다. 초인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고통 앞에서 좌절하고 도피하려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태도이자 방향입니다. "삶은 어렵다"고 고민하고 고뇌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이미 초인을 향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셋째, '천명(Calling)'은 '주어지는 목적'이 아니라 '응답하는 태도'입니다.


낡은 의미의 천명이 외부(신, 하늘)에서 "너는 이것을 해라"라고 정해준 목적이라면, 새로운 의미의 천명은 "나의 삶이 나에게 던진 이 '무게'와 '어려움'에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고유한 고통이자 질문입니다.


결론


'존재의 목적'은 누군가 찾아주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합목적성'이라는 낡은 개념 속에 있지 않습니다.


삶의 목적이란, "삶은 어렵다"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주어진 고통과 무게에 대해 "나는 이것을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만의 가치를 창조하겠다"고 응답하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목적은 찾는 것(Finding)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통해 창조하는 것(Creating)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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