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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초이스> by 이영도

365 Proejct (352/365)

by Jamin

유한한 슬픔, 그 불멸의 특권에 대한 변론

— 부활의 세계에서 다시 쓰는 '인간의 조건'


이영도 작가의 《오버 더 초이스》는 겉보기에 수다스러운 보안관보와 기상천외한 이종족들이 벌이는 소동극처럼 보인다. 그러나 빗줄기가 어깨를 때리는 날카로운 통증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그 유쾌한 껍질 속에 가장 무거운 질문을 품고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섯 살 아이 서니 포인도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부활'이라는 기적적 재앙. 소설은 이 대립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왜 죽음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왜 저주가 아닌 특권인지 변론한다. 부활이 가능한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작가가 포착하려는 것은 죽음의 극복이 아니라,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빛나는 삶의 본질이다.


1. 유한성의 존엄: 가격표가 붙은 생명을 거부하며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갈등은 '생명의 경제학'이다. 부활이 가능한 세계에서 생명은 수리 가능한 기계나 교체 가능한 부품과 유사해진다.


"어떤 금액으로든 삶에 값을 매기면 안 돼. 일단 가격이 책정되면 그다음엔 거래도 가능해지거든."


이 문장은 단순한 경제적 우려를 넘어선다. 죽음이 극복 가능한 기술적 문제가 되는 순간, 삶은 엔딩을 잃는다. 끝이 없는 이야기에 긴장감이 없듯, 죽음이 없는 삶에는 존중이 깃들 자리가 없다. 죽으면 다시 살려내면 그만이기에, 타인을 향한 애틋한 보살핌은 불필요한 비용 낭비가 된다.


더 나아가, 부활 기술은 불평등을 강화한다. 누가 부활의 혜택을 받을 것인가? 얼마를 지불할 수 있는가? 생명에 가격표가 붙는 순간, 우리는 어떤 생명은 더 가치 있고 어떤 생명은 덜 가치 있다는 암묵적 서열에 동의하게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종착지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은 역설적으로 '되살릴 수 없음'에서 나온다. 우리는 서로가 언젠가 부서지고 사라질 존재임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 떨리는 손으로 서로를 붙잡는다. 유한성은 비극이 아니라 사랑을 가능케 하는 전제 조건이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상대를 대체 불가능한 유일자로 인식하고, 그의 부재를 상상하며 현존에 감사한다.


2. 식물의 방식 vs 동물의 방식: 동화되지 않는 '나'


이 작품의 독창성은 죽음의 대척점에 '식물(Green Core)'을 놓았다는 점이다. 식물은 개체가 죽어도 뿌리로 연결되어 거대한 전체로 순환한다. 그곳에 영원한 삶은 있으되, '너'와 '나'의 구분은 없다. 이것은 죽음을 극복한 형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개별적 자아의 소멸이다.


식물의 방식이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범신론적 합일이다. 모든 개체는 거대한 생명 네트워크의 일부로 흡수되어 영원히 존속한다. 이것은 많은 종교와 철학이 추구해온 이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 아름다운 비전 속에 감춰진 폭력을 포착한다. 전체 속에 녹아드는 것은 '나'의 소멸을 의미하며,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타자성 또한 불가능해진다.


반면 동물, 즉 인간은 고독한 개체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서로를 존중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식물의 방식이 주는 달콤한 유혹—영원과 일체감—앞에서 티르는 고통스럽더라도 '동물의 방식'을 고수한다. 그것은 슬픔과 상실을 겪더라도, 나라는 존재의 경계를 지키고 타인을 타인으로서 사랑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선택은 고독을 감수하는 용기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인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고,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대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바로 이 불가능성이, 이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윤리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타자를 완전히 소유하거나 동화할 수 없기에,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


3. 기억: 인간이 수행하는 유일한 부활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기만 한가? 아니다. 작가는 물리적 부활 대신 '기억'이라는 인간 고유의 부활 방식을 제시한다.


"미안. 음. 서니. 너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될 수 없어."


죽은 자는 돌아오지 못하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산 자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이영도 작가가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인간의 무한성'과 닿아 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나를 타인에게 나누어주고, 타인의 삶 속에서 보존된다.


여기서 "잊지 못한 채 죽으면 언제 잊어. 살아 있어야 잊을 기회도 생기지"라는 역설은 깊은 의미를 품는다. 살아남은 자만이 잊을 자유와 기억할 의무를 동시에 가진다. 잊지 않음은 곧 마음속에서 대상을 불멸하게 만드는 행위다. 그러므로 살아남아 기억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떠난 이를 위한 가장 숭고한 의식이다.


기억은 고정된 박제가 아니다. 우리는 죽은 이를 반복해서 다시 떠올리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매번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하며, 그들을 우리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쉬게 한다. 이것은 물리적 부활보다 더 역동적인 과정이다. 죽은 이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정지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생성하는 살아있는 힘으로 작동한다.


4. 관 위에 선 자의 윤리: 그럼에도 살아간다


작품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잔혹하리만치 냉정한 윤리를 요구한다. 그것은 "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관 위에 서야 하는" 의무다.


사랑하는 이가 괴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슬픔을 딛고 그들의 죽음을 확정 지어야 한다. 이것은 방관이나 체념이 아니다. 서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내 자랑거리가 누군가의 시체밖에 없는 처지"라는 부끄러움을 온전히 감당하면서도, 끝내 삶을 선택하는 용기다.


이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윤리적인 순간이다. 티르는 서니를 사랑했기에, 서니가 괴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죽음 위에 선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죽음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다. 부활이 가능한 세계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은 자에 대한 최고의 예우가 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우리의 현실과 만난다. 세월호, 이태원,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참사 이후, 남겨진 우리에게는 거대한 무력감이 찾아온다. 우리는 왜 살아남았는가?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 소설 속 티르처럼,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살 겁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단순한 문장은 비겁한 변명이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외면하지 않되, 그 슬픔에 잠식되어 함께 죽지 않겠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지다. 살아남은 자의 책임은 자책과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삶을 계속해나가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5. 이야기의 힘: 유머와 슬픔 사이에서


이영도 특유의 유머와 만담은 이 무거운 비극을 견디게 하는 완충제이자, 인간성을 지키는 방패다. "많이 슬퍼서 그래. 사람이 너무 슬프면 술에 취한 것하고 비슷해져"라는 말처럼, 우리는 슬픔을 농담으로, 이야기로 승화시키며 버텨낸다.


작품의 톤은 끊임없이 진지함과 경쾌함 사이를 오간다. 이것은 단순한 문체적 특징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반영한다. 우리는 비극 속에서도 웃고, 농담을 던지고, 일상을 이어간다. 이것은 슬픔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사는 방법이다. 유머는 절망에 대한 저항이며,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티르의 수다는 방어기제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방식이다. 그는 말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생각을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함으로써 관계를 이어간다. 이것은 고립과 침묵에 대한 거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이야기를 통해 의미를 만들고 세계를 이해한다.


6. 결론: 이야기꾼으로서의 생존자


결국 《오버 더 초이스》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죽은 서니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티르는 "난 네 이야기를 할 거야"라고 다짐한다. 우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 안에서 진정한 의미로 부활한다.


이야기는 기억을 보존하는 그릇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고, 부재하는 이들을 현존하게 만든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우리는 언어를 가졌기에, 시간을 초월하여 의미를 전달하고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기술로 육체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마음으로 기억을 되살리는 것. 슬픔을 회피하지 않고 끌어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유한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특권이자,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


《오버 더 초이스》는 죽음을 긍정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있는 삶을 긍정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살고, 잃기 때문에 사랑하며, 끝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만든다. 부활의 유혹 앞에서 유한성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제시하는 인간다움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코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남기 위한,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한, 가장 용감한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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