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Proejct (36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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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기 016: 아무튼 무협을 다시 씀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영화 <영웅본색>의 대사가 뼈아프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뉴스를 보며 주먹을 쥐게 만드는 부조리한 사건들, "저건 아니지 않느냐"며 울분을 토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하지만 그 분노 끝에 남는 것은 무력감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밥벌이의 현장으로,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나에게 '무협(武俠)'은 단순한 킬링타임용 도피처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결핍을 메워주는 '대행자(代行者)들의 이야기'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보며 뜬금없이 무협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어벤저스'라는 초인 집단을 국제기구 산하에 두고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 다룬다. 아이언맨은 책임론을 들어 시스템 속에 영웅이 귀속되기를 지지하고, 캡틴 아메리카는 시스템의 경직성을 우려하며 개개인이 하나의 기관이자 판사(<저지 드레드>와 같은)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가상 세계 속에서조차 나는 아이언맨의 편이었다. 현실의 나는 자경단의 칼날보다는 법전의 권위를 믿으려 노력하는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무력이 통제되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야만적인지 알기에, 나는 기꺼이 시스템의 통제를 받아들이고 투표를 통해 세상을 조금씩 수정해 나가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옛말처럼, 현실의 그물망은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다 받아내지 못할 만큼 성기다. 나이가 들수록 그 구멍들은 더 크게 보이고, 응당 받아야 할 벌을 피해 가는 악인들 앞에서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라고 말하기엔 나는 너무 작고 무력해져 버렸다.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영웅심리는 사라지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는 자조 섞인 현실 인식만이 남았을 때.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무협'이, 시스템 밖의 '영웅'이 절실해진다.
자경단 활동이 헌법에 명시된 미국에서 슈퍼히어로물이 인기를 끌듯, 유교적 규범이 지배하던 동양에서 시스템에 반(反)하는 무협이 인기를 끈 것은 필연적이다. 사마천의 <자객열전> 속 자객들이 그러했듯, 그들은 국법보다는 '강호의 도의', 즉 '협(俠)'을 따른다.
흥미로운 점은 시대가 변하면서 대중이 원하는 '협'의 모습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묵향>이나 <비뢰도> 같은 신무협이 등장했을 때, 이미 전통적인 의미의 고리타분한 '도의'는 희석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웹소설에 이르러서는 주인공들이 훨씬 더 개인적이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협이 사라졌다"고 개탄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현대인들의 솔직한 욕망이 투영된 결과라고 본다. 국가나 대의명분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영웅보다는, 내 눈앞의 불의를 참지 않고 내 사람을 건드리면 반드시 응징하는 '사적 구원자'를 원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너무 작아졌기에, 대신 화내줄 누군가가, 나만을 위한 확실한 아군이 필요해진 탓이다.
무협이 마블과 결정적으로 다른, 그리고 내가 무협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성장의 서사'에 있다.
캡틴 아메리카의 슈퍼 솔저 프로젝트, 헐크의 감마선 사고, 혹은 외계인의 혈통 등 서구의 영웅들은 대개 '비범한 탄생'이나 '우연한 사고'를 통해 힘을 얻는다.
하지만 무협은 다르다. 무협의 세계는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초인, 혹은 부처나 신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군림천하>의 진산월이 사부의 유지를 잇기 위해 처절하게 수련하듯, 무협의 주인공들은 세계가 정해준 규칙(무공) 안에서 뼈를 깎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힘을 기른다.
어릴 적에는 그저 악당을 물리치는 카타르시스가 좋았지만, 이제는 결과의 즉시성보다는 그 과정에 더 마음이 간다. 인간의 몸으로 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수련의 과정, 어제보다 강해지는 오늘의 나. 비록 현실의 나는 평범할지라도, 노력의 가치가 온전히 보상받는 그 정직한 인과율의 세계가 나를 매료시킨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낮에는 시스템의 일원으로 성실히 살아가고, 밤이 되면 무협지를 편다.
현실의 나는 법과 질서를 준수하며 투표로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는 아이언맨의 지지자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강호의 도의를 기치로 내걸고 시원하게 칼을 뽑아 드는 캡틴 아메리카를, 나의 대행자들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비겁한 도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잡하고 고단한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가장 안전하고도 뜨거운 위로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