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는 어떻게 사용자를 춤추게 하는가

365 Proejct (360/365)

by 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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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된 자유: 기획자는 어떻게 사용자를 춤추게 하는가


‘자유’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이영도의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첫머리에서는 자유를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정의하며, 우리를 얽매는 주체는 보통 타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거창한 철학적 담론을 우리네 일터, 즉 ‘기획자’와 ‘사용자’가 만나는 서비스와 제품의 세계로 가져오면 이야기는 조금 미묘해진다.


기획자는 본질적으로 사용자를 ‘얽매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메뉴얼이라는 이름의 제약, 그리고 탈주하는 사용자


기획자는 제품을 만들 때 사용자를 정의(Define)한다. 페르소나를 세우고, 그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한 뒤, 가장 효율적인 길을 닦는다. 그리고 ‘메뉴얼’이나 ‘주의사항’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친다. “우리 제품은 이렇게 쓰세요, 저렇게는 쓰지 마세요.”


하지만 사용자는 기획자의 의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그들은 메뉴얼을 읽지 않는다. 바지를 입은 채로 다림질을 하고, 샤워캡을 씌워 두 사람의 머리를 억지로 집어넣는다. 머그컵은 연필꽂이가 되고, 꼬치구이 소스 통은 분무기가 된다. 심지어 포스트잇을 접어 전동드릴의 먼지 받침대로 쓰는 기상천외한 응용력(혹은 오용)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기획자가 설정한 ‘제약’과 사용자가 추구하는 ‘자유’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기획자는 선택해야 한다. 사용자의 자유분방함을 ‘오용’이라 규정하고 경고문을 붙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본능을 이해하고 설계를 바꿀 것인가.


통제받는 줄 모르는 통제, ‘젤다’의 역설


나는 사용자의 ‘자유를 향한 본능’은 결코 억누를 수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뛰어난 기획이란, 사용자가 기획자가 설정한 제약 사항대로 행동하면서도, 그것을 본인의 자유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사례가 바로 닌텐도의 게임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이다.


이 게임은 사용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하게 계산된 기획자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 기획자는 맵의 지형을 삼각형으로 배치하여 사용자의 시선을 산 꼭대기(목표)로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게 만든다.


사용자는 높은 절벽이라는 ‘물리적 제약’을 만났을 때, "길이 막혔네"라고 짜증 내지 않는다. 대신 "내 스테미너를 관리해서 저곳을 정복해야지"라고 생각하며 그 제약을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기획자가 의도한 길을 따라가고 있음에도, 사용자는 자신이 스스로 개척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설계된 자유(Designed Freedom)’이자, 기획자와 사용자의 심성 모형(Mental Model)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이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내놓으며 "손가락이야말로 최고의 도구"라고 했을 때, 우리가 느꼈던 그 매끄러움(Seamless) 역시 이런 맥락이다.


필요한 마찰과 기획자의 헌신


물론 모든 제약이 ‘놀이’가 될 수는 없다. 금융 앱이나 보안 서비스처럼, 사용자의 자유보다 ‘안전’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영역이 있다. 이곳에서의 제약은 사용자를 귀찮게 하는 ‘나쁜 마찰’이 아니라, 실수를 방지하고 신뢰를 주는 ‘좋은 마찰(Good Friction)’로 작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사용자가 자유롭게 날뛰어야 할 곳에는 ‘젤다’ 식의 광야를, 신중해야 할 곳에는 단단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것. 사용자의 감성과 상황을 고려하여 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기획자의 핵심 역량이다.


예술가가 아닌 기획자의 자유


기획자가 하는 일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에 자유롭다. 하지만 기획자는 다르다. 기획자에게도 "사용자가 내 의도대로만 써줬으면" 하는 욕심, 즉 기획자로서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의도를 관철시키기보다, 사용자가 자유로움을 느끼도록 판을 깔아주는 데서 희열을 느껴야 하는 직업이다. 나의 의도가 사용자의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그들이 "이 제품은 원래 이렇게 쓰는 거지"라고 당연하게 느낄 때, 기획은 비로소 완성된다.


사용자의 자유를 위해 기획자의 표현 욕구를 절제하고 다듬는 것. 역설적이게도, 타인의 자유를 가장 정교하게 설계하는 순간 기획자 또한 자신의 의도(Intent)를 가장 강력하게 실현하는 셈이 된다.


우리는 사용자를 춤추게 한다. 그들이 춤추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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